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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16. 2023

향이 좋군요 가을입니다

우리 학교에는 계단이 많다. 학교 별관 뒤편에 있는 교직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건물 바로 옆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와서 별관 3층까지만 올라가면 되니까. 그런데 이마저도 요즘 별관 공사 중이어서 바로 건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본관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별관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많이 걸어야 한다. 학교가 산 바로 아래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근처 아파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많은 계단과 오르막길을 오가야 한다. 마트에서 강당 옆으로 들어오는 길이 가장 먼데 여기부터 별관까지 오는데 계단 수가 1000개라면서 '천 개의 계단' 장난식으로 말하던데 정말 장난이 아니라 1000개 이상인 것 같다. 헉헉 대고 교실에 들어오는 아이들 얼굴에 구슬땀이 똑똑 맺혀 있는 것을 보면 앞으로 졸업 때까지 이렇게 힘들어야 할 아이들이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걸어오는 그 길이 향기에 설렌다.

학교 가득 휘감는 꽃향기가 공사하느라 날리는 먼지나 마감재 냄새도 없애준다.

가쁘게 내쉬는 숨이 아니라 꽃내음에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져서 호흡도 평온하다.

꽃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걷는 걸음마다 향기가 남는다.

주인공은 금목서다.

가을에 그 향이 만리까지 간다고 해서 만리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달콤한 복숭아 향 같기도 하고 새큼한 자두 향도 나는 것 같다. 작은 주황색 꽃잎이 가지마다 다글다글 달려 있어서 조그만 구슬 같은 이 꽃은 작은 꽃잎 하나하나 향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마디마다 수십 개의 꽃들이 가느다란 꽃자루에 매달려 있는데 멀리서 보면 이게 꽃인지 꽃가루인지 잘 구분이 안 가지만 자세히 보면 그 작은 꽃 하나하나 끝이 갈라진 작은 종처럼 생겼다. 통통한 노란 꽃잎을 하나 따서 코에 대보면 바로 그 향이다.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공원에도 금목서 나무가 꽤 많이 있고 본관 건물 앞 화단에는 장승처럼 계단 양쪽에서 두 그루가 예쁘게 자리하고 있다. 사계절 중 가을에 유독 계단이 덜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가 금목서 향기 때문이라고 혼자서 주장하고 있다. 학교뿐만 아니라 동네를 걷다가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난다 싶으면 어김없이 금목서가 있다.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양하겠지만 나는 금목서 향기 때문에 가을을 좋아한다.


퇴근 후 아이들과 동네를 산책했다. 편의점에서 산 과자 한 봉지 들고서 천천히 걷다가 가을이면 꼭 가는 작은 공원에 갔다. 동네 아파트 단지 바깥에 있는 작은 공원인데 오래되어 녹슨 운동기구가 삐걱거리고 낡은 벤치는 페인트가 벗겨서 평소에는 잘 오지 않는 곳이지만 이맘때쯤이면 꼭 간다. 아파트 단지 조성할 때 심은 금목서 나무가 빼곡하게 자라 작은 오솔길이 되어 짧은 그 길을 걸으면 향기 때문에 행복하다. 아이들은 과자 한 봉지를 서로 더 먹겠다고 아웅다웅하다가도 엄마가 연신 좋아하자 궁금해져선 같이 꽃냄새를 맡는다. 아들은 몰래 한 가지를 꺾어 건네준다. 작은 가지라도 수십 개의 꽃들이 당글당글 달려있어 꽃이 가득하다. 남의 꽃을 꺾으면 어떡하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아이 손에 가득 뭍은 향기에 이내 마음이 풀어졌다.


더 추워지기 전에 주말엔 캠핑을 갔다. 가을이면 가는 캠핑장인데 시설이 썩 훌륭하지는 않지만 너른 운동장과 바로 앞에 보이는 바다가 예뻐 갈 때마다 좋은 자리는 맡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제일 좋은 자리를 맡았다. 텐트를 치고 짐을 정리하는데 또 꽃향기가 났다.

오래된 폐교를 고쳐서 만든 캠핑장이라 곳곳에 동상도 많고 고목들 사이에 잡초도 많아 어디서 나는 향기인지 분간이 안 갔다. 더 어둡기 전에 짐 정리를 서둘러하고 그날 밤은 떠 매가도 모르게 잤는데 아침에 아이들 소리에 일어나니 또 꽃향기가 나길래 텐트 주변을 찾아보니 어김없이 금목서다. 주변에 잡목들이 가득해서 무슨 나무인지도 몰랐는데 마르고 작은 금목서 한그루가 여전히 살아있어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조용한 캠핑장이 우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와 꽃향기로 가득했다.

점차 코끝이 시린 계절이 다가온다.

가을을 준비하며 옷장도 정리하고 이불도 바꿨지만 진짜 가을이라고 알리는 신호는 금목서 향기다. 금목서가 지면 이름도 비슷한 은목서가 핀다. 둘이 이름도 비슷하고 나무 형태도 비슷하지만 이파리 모양과 꽃잎 색깔이 조금 다르다. 금목서는 매끈하고 길쭉하고 은목서는 타원형에  둘레엔 뾰족한 톱니가 있다. 또 꽃잎 색깔도 나무 이름처럼 금목서는 금빛의 주황색이지만 은목서는 이름처럼 은빛의 하얀색이다.

논도 밭도 없이 아파트로 둘러싸인 이 마을에 꽃향기가 나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가을이 됐다는 신호다.


파란 가을 하늘도 좋고 단풍도 좋지만

제일은 금목서 향기라서 

남은 가을도 창문을 활짝 열고

꽃향기를 가득 들여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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