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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23. 2023

너의 목소리가 들려

자질구레 해방작전

핸드폰으로 제일 많이 하는 것은 쇼핑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네이버 장보기로 홈플러스나 이마트에서 장을 본다. 발행된 쿠폰이 있는지 살펴보고 1+1 상품이 뭐가 있는지 검색한 다음 더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생각해 본 후 장바구니에 넣고 결재한다. 결재 후에 꼭 더 필요한 물건이 생각이 난다. 물건들이 배달된 이후에는 사진을 찍은 후 상품평을 올린다. 대강 올려도 사진만 있으면 포인트를 주니까 이런 포인트로 다시 또 장을 본다. 먹을 것, 생필품 구매를 다 하면 다음엔 원쁠딜이 뭐가 있는지 좀 보고 오늘 브랜드데이는 어떤 브랜드가 세일을 하는지 꼼꼼히 살펴본다.

와이드 청바지도 이뻐 보이고 베이지색 플리츠스커트도 사고 싶다. 아들 운동회에 입고 갈 체육복이 좀 후줄근한 것 같아 하나 살까 싶다. 원래 사고 싶던 브랜드는 아직 세일을 안 해서 가격이 너무 비싸니까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나 검색을 한다. 내가 입을 곳 검색을 한바탕 하고 나면 이제 아이들 옷 구경을 한다.

딸내미가 청바지 사달라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나서 청바지를 고르다가 애들 바람막이가 너무 얇은 것 같아서 가을에 입을만한 바람막이 뭐가 있나 둘러본다. 색깔이나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도 평균보다 작은 우리 아이들에게 사이즈가 맞을지 고민하다가 결재 버튼 누르기 전에 장바구니에 넣어둔다. 그러다가 사이즈 크게 사서 건조기 두어 번 돌리면 되나 싶어 다시 들여다본다.


이렇게 아이들 옷 검색을 하고 나면 쿠팡에 들어가서 애들 문제집이나 읽고 싶어 하는 책, 세탁 세제, 정수기 필터, 폼클렌징, 샴푸가 떨어졌나 생각하다가 장바구니에만 넣어두고 일단 나온다.

요즘 많이 검색하는 것은 수영복이다. 지금 입고 있는 수영복이 1년 정도 되니 조금 색이 바랬고 수영장에 너무 같은 수영복만 입고 가면 그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둘러본다. 이것저것 예쁜 디자인은 많지만 결국은 내 몸이 감당을 못할 것 같아 여기저기 사이트에 들어가 보고 그냥 나오기를 마지막으로 하면 시간이 훌쩍 흘러있다.


핸드폰으로 제일 많이 하는 것이 쇼핑일 줄은 나도 몰랐다.

유튜브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아 어플을 지웠고 카톡은 별로 안 보고 SNS는 안 한다. 게임도 별 흥미가 없는데 쇼핑은 좋다. 재밌다. 

여기저기서 새로운 물건들이 갖고 싶은 물건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다. 직접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부담도 없다. 그저 장바구니에만 담아 두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돼서 그런지 시종일관 검색과 비교, 장바구니 넣기, 결재 같은 일련의 과정을 반복한다. 통장 잔고는 빤한데 필요한, 필요할 것 같은, 지금 안 사면 안 될 것 같은 물건들은 매일 넘쳐난다. 뭔가 단단히 잘못 됐다.




소설 '우주를 듣는 소년' 책을 다 봤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사물에게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소년의 이야기다. 엄마, 학교 선생님, 친구들, 의사는 소년(베니)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소아정신과 진료와 치료를 병행하지만 소년은 계속해서 소리를 듣는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비명, 가위가 선생님을 찌르라고 하는 외침, 낡은 운동화를 신을 때 힘들어하는 운동화의 한숨까지 모두 자신을 둘러싼 모든 물건들의 소리를 듣는 소년이 가장 힘들어하는 곳은 바로 자신의 집이다.

 엄마의 직업은 신문에서 정보를 검색해서 스크랩하는 일이다. 작업 후 모든 인쇄물을 보관(백업) 해야 하는데 달리 넣어둘 곳이 없으므로 집안 구석구석 쓰레기봉투 안에 넣어 쌓아 둔다. 그러다가 시대가 변해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종이에서 CD로 저장 매체가 달라졌지만 결국엔 집안에 쌓아두는 것은 같다.

퇴근 후 짬이 나면 엄마(에너벨)가 하는 유일한 취미는 중고용품 가게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다. 집에 쌓아두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곳에서 예쁜 스노우볼, 베니가 어린 시절 좋아했을 법한 고무 오리, 조금 금이 갔지만 쓸만한 너무 완벽한! 찻잔 세트를 사 온다.

살 때의 그 흥분과 떨림,

이 물건을 사용할 때의 만족감,

선물을 받고 기뻐할 가족들의 웃음에 대한 기대들은

집에 오자마자 산더미 같은 짐더미에 묻혀 사라져 버린다.


에너벨도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지만 쉽지 않다.

아들 베니는 물건들의 소리를 듣는다면 엄마 에너벨에게는 물건마다 소중한 추억이 있어 함부로 버릴 수 없다. 죽은 남편의 옷으로 이불을 만들기 위해 한 장도 버리지 않았지만 정작 언제 이불을 만들지는 미지수다.

정리의 마법이라는 책을 보면서 자신의 행동에 변화를 주고 싶지만 바쁜 일과 불어나는 자신의 몸과 점점 입을 닫고 다른 세계로 가려는 아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 정리는 결국 다음 날로 미뤄버리기 일쑤다.


에너벨의 모습에 결코 비웃음이 나오지 않는 것은 어쩌면 정도의 차이지만 나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장보기를 빙자하여 핸드폰으로 매일 사지도 않을 물건을 검색하고 결국 결제까지 해버린 후 또 사고 말았다는 자괴감이 들면 애써 정말 필요했다고 위로하며 절대 합리적이지 못한 소비를 하고 있는 내 모습과 비슷해서다.

지금 세일을 하니까 안 사면 손해!

정말 필요해지기 전에 미리 사두는 것이 좋아!

지금 사면 언젠가 쓸 테니까 사자!


이런 식으로 하는 쇼핑이 진정한 필요에 의한 소비 활동이 아니라 그저 재미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물건을 갖게 될 때 그 짜릿함을 느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배송이 된 후에는 누가 볼까 봐 옷방에서 몰래 상자를 열고 확인한 후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해서 다시 검색하는 반복의 굴레에 빠진다.


내 물건들도 지금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이다.

나 좀 봐달라고 숨 좀 쉬게 해달라고!

여기 좁은 옷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서랍 안에서 곰팡이에 잠식된 채 죽어가고 있는 물건들을 해방시켜야 했다.


책을 읽은 후 가장 먼저 한 것이 내 방 정리였다.

일요일 오전부터 시작해서 늦은 점심 먹기 전까지 서랍 안을 뒤집어 정리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와 샀던 잡지, 발가락이 부러져서 미리 잔뜩 사두었던 붕대, 딸이 어렸을 때 머리에 꽂아줬던 반짝이 머리칼,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클립, 단추, 화장품 샘플, 쓰다가 남은 핸드크림, 작은 종이 가방, 안 입은 지 오래된 검은 스타킹, 아이들 수유할 때 입었던 티셔츠!

지금 보면 자질구레한 것들이지만 언젠가 너무 필요해서, 소중해하며 구입했을 물건들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린 채, 아니 이미 포기하고 죽어가는 물건들이 내 화장대에 수십 개였다.  

그리고 그들이 내 손길을 기다린 채 맨 처음 놓인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숨 막히게 하는지도 미처 몰랐다. 다 쏟아 버린 후 하나하나 물건을 주워 분류해서 버리는 것으로 주말을 거의 다 썼다.


그렇게 해서 숨통이 트였을까?

이야기 속 베니는 책 사이사이 글자가 나갈 틈을 구멍을 뚫어 만들어줬다.

엄마 에너벨은 추억으로 점거된 자신의 집을 이젠 자신의 삶을 위해 비워냈다.


나 역시

내 취향과 선택으로 가득한 이 집안에

추억을 빙자하고, 필요로 위장한 물건들이

내 삶을 채우기 전에 차분히 정리해야겠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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