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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31. 2023

목소리의 형태

과잉 친절 금지


(목소리의 형태 :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이지만 영화 내용과 관련 없음)

교실 프린터에 토너가 거의 바닥이 났다. 희미하게 인쇄가 되길래 버티고 계속 사용하던 중이었다. 학년실에 따로 복사기가 없어서 학습지 인쇄할 때는 다른 학년 연구실에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가서 몰래 복사를 하곤 했다.


더 이상 안 되겠어서 교무실에서 토너를 가지러 갔는데 내가 사용하는 토너 번호가 없었다. 그래서 숫자 부분만 다른 토너 상자를 들고 와서 열어 보았는데 토너 모양 자체가 달랐다. 상자 안에 넣어두고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일단 담당 선생님을 찾아 물어보았다.


"선생님 저희 반 토너가 다 떨어졌는데 교무실에 딱 맞는 토너가 없더라고요."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다.

"네. 토너 번호 알려주시면 기사님께 말씀드릴게요. 조금 기다리시면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교무실에 토너 있어요. 장부에 토너 번호 적고 가져가시면 돼요."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예. 알고 있는데 저희 반 프린터에 쓰던 토너가 없어서요. "

"그러면 미리 말씀을 해주셔야 알죠. 예전에 쓰던 토너 번호 찾아서 가져가시면 돼요."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토너 사용 장부를 들춰봤다.

장부는 몇 년 전부터 쓰던 것으로 새 학기마다 학반이 옮겨질 수 있기 때문에 그전 장부를 봐도 정확히 토너 번호를 알 수는 없었다.


다시 말을 했다.

잘못 가져간 토너를 사용하지 않은 채 넣어놨다는 말을 해야 했다.

"1학기 때는 토너가 있어서 가져다 썼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없어서 비슷한 번호를 가져갔는데 프린터에 들어가지 않더라고요. 봉지는 뜯어놔서 포스트잇에 개봉만 한 것이라고 적어두었어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다 알아서 써요. 그냥 떼세요."


혹시 개봉해서 이미 사용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까 봐 붙여놓았는데 필요 없다고 하니 머쓱했다.

포스트잇을 떼고 다시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그때 까지도 장부를 보고 있었다.


 "저희 반만 **프린터(프린터 이름)를 쓰나 봐요. 토너가 있을 줄 알았는데 없어서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그 프린터는 선생님만 써요. 아무도 안 써요. 그리고 없으면 말을 해주셔야 알죠. 일단 아저씨 아니 기사님께 말해 놓을게요. 나중에 찾아가세요. "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교무실에서 나왔다.

별 말도 아니었다. 그냥 프린터 토너가 없어서 주문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건넨 말에 돌아오는 대답에 가시가 있다고 느낀 건 내가 예민해서였을까


어떤 말이 걸렸던 걸까?

미리 말해야 했다는 말 

(내 귀에는) 네가 말을 안 해서 내가 주문을 안 한 거니 내 책임은 아니다.

포스트잇 떼라는 말 

(내 귀에는) 쓸데없는 행동은 왜 하는 거냐

그 프린터는 선생님만 쓴다는 말

(내 귀에는) 너만 쓰는 거니까 없으면 바로 말을 해야지. 내가 알기론 내가 쓰는 프린터 토너는 예시로 적힐  정도로 많이 쓰는 재생 토너였다.


그 선생님과는 별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 처음으로 조금 길게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선생님이 잘못 말하시거나 화를 낸 것도 아니었는데 왜 가시처럼 콕콕 박혔을까?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분위기의 대화였기에 당황스러웠다. 원하는 대답을 못 들었던 것도 아닌데 왜 기분이 나빴던 것일까?


말은 그저 흩어지는 몇 개의 단어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말하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말하던지 듣는 사람은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들으려고 든다.

그래서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내가 학부모나 다른 선생님들에게 전화를 받을 때마다 놀린다.

"어머니~!!"

내 목소리가 가식적이고 과하게 친절하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투나 행동을 따라 하면서 놀리지만 나는 별로 상관없었다. 교사가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래야 한다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수업할 때 내 목소리는  평상시 가족들과 이야기할 때보다 5음 정도 올라간다. 말할 때 "솔"음으로 말하라고 했던 어떤 교감선생님의 말을 기억하고 그것을 십여 년째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평소 말투대로 말하면 아이들은 내가 뭔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고 태도를 바르게 한다.


원래 목소리보다 말을 높고 크게 하니까 수업을 할 때마다 쉽게 지친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군에 교사가 항상 속하고 그로 인해 성대 결절이 직업병 중에 하나라는데 나 역시 환절기면 목감기에 걸릴까 봐 가장 민감하다. 평소보다 목이 따끔거리면 선제적으로 목감기 약을 다량 투여한다. 물도 자주 마신다.

나도 모르게 나의 목소리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선생님도 그저 내가 말하는 형태로, 분위기로 말했으면 했나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뭔가 예의 없어 보이고 친절하게 보이지 않으니까 온갖 미사여구를 넣어 부탁을 하고 과하게 감사함을 표시했다.

그리고 상대방도 나처럼 나에게 친절하기를 바랐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말은 간결하게 의사를 표현하고 원하는 바를 전달하면 되는 거다. 

학교에선 그거면 됐다.

당당히 요구할 때조차 나는 친절함을 놓치 않았다.

항상 감사하고 항상 죄송했다.

진심이 아닌 적은 없었지만 내가 친절하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친절할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 선생님은 다음날 토너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나는 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모티콘 ^^ 도 빼고 정말 감사합니다!!! 느낌표 세개도 뺐다. 과하면 안 좋다.

내 목소리는 높은 곳에서 이제 조금 내려와야겠다. 둥글둥글 통통 튀는 모양 대신 평탄하고 곧게 가야겠다.

대화 예절 배운 후 만든 표어가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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