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방 만들기 임무 완료
짧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있다.
이제 밤 기온이 조금은 내려갔는지 밤에 자다 깨서 거실에서 잘 때면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되었다.
새벽 수영도 다녀왔고, 방과후학교 금방 다녀온 딸과 거실에 함께 있으니 부산하고 소란했던 어제가 아득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홀가분해졌다는 것! 내 마음이 아니라 우리 집이 홀쭉해졌다.
방학 동안 꼭 해야 하는 것이 세 가지 있었다.
1. 시부모님과의 제주도 여행
2. 아이들 건강검진 및 구강검진
3. 아이들 방 만들어주기
이 중에서 가장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 아이들 방 만들어주기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첫째 아이는 올해 들어 줄기차게 자신만의 공간을 원했다. 2살 터울의 남동생과 떨어져서 어느덧 자기 방을 갖고 독립하길 주장한 것이다. 물론 동생이 워낙 같이 지내기 힘든 룸메이트이긴 했다.
그동안 작은 방에 침대 두 개와 옷 서랍장 정도만 넣어두고 맞은편 가족실에는(거실에 분리되지 않은 가족 공간이 있음) 아이들 장난감이며 책장, 서랍 등을 두고 거기서 놀 수 있도록 했다.
아이들 방 만들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놀이방에 있던 아이들 물건을 각방에 넣기 위해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을 정리하는 것과 각 방에 있는 책장과 침대를 옮기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더 둘러볼 것도 없이 평범한 방 3개짜리 아파트는 어느새 가족들 각자의 물건으로 포화상태였다.
네이버 쇼핑에서 브랜드데이, 장보기로 물건 사는 것이 낙인 엄마와 그런 엄마를 닮아 학교 앞 문방구 가는 것이 행복인 아이들은 차곡차곡 자신의 취향으로 집안을 가득 채운 상태였다.
그런 집에서 버릴 물건과 갖고 있을 것, 나눌 것을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머리 아픈 일이다.
1차로 지난 월요일 아이들 서랍장을 정리했다. 유치원에서 가져온 여러 가지 교구들, 이제는 보지 않는 책들, 아이들이 만든 작품, 다 쓴 문제집, 공책들, 쓸 수 있는 학용품을 정리하는 데만도 월요일 하루를 다 보냈다. 그때 50리터짜리 1개, 20리터짜리 2개 쓰레기봉투를 썼다. 정리한 물건을 분리수거장으로 옮기는 것도 한참이었다.
그리고 광복절인 어제 본격적인 방 옮기기에 돌입했다.
먼저 아이들 놀이방에 있던 물건을 전부 들어내 거실에 옮겼다. 시리얼로 때운 아침 식사가 부실했을 텐데도 아이들은 기운차게 책이며 장난감을 차례로 옮겼다.
놀이방에 있던 짐이 거실로 다 나오자 거실은 발 디딜 틈 없이 정신없었다. 놀이방 책장이 생각보다 너무 무거웠는데 바닥에 매트가 깔려있어 더 움직이기 힘들었다. 바닥 매트를 먼저 치워야 했다.
그다음은 옷방에 있던 시스템장 옮기기다.
옷장에 걸려있는 옷을 모두 거실에 쌓아두고(아까 늘어두었던 아이들 짐 사이사이로) 시스템장을 분리하여 놀이방으로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는 쉬웠다. 남편이 미리 분리하는 연습을 한 덕분에 옮기기는 수월했지만 어디서 아귀가 안 맞았는지 조립할 때 잘 들어가지 않아 남편이 한참 애를 먹었다. 그동안 나는 이제 입지 않는 옷들을 정리했다. 분명 살 때는 새 옷을 멋들어지게 코디하여 입을 것을 생각하며 행복했을 텐데 그런 행복감은 물건이 도착하자마자 산산이 부서졌을 그런 옷 말이다.
인터넷 쇼핑은 너무 편하지만 너무 쉬워서 너무 잊는다. 그런 옷들을 살 때마다 나의 손과 뇌를 탓하지만 결국엔 잠깐의 설렘을 느끼기 위해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하는 내가 미웠다. 그런 옷을 하나하나 버리면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하지 다짐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런 실수를 하고 있었다.
다음은 침대와 책장 옮기기다.
일룸에서 산 키즈 침대는 아주 무겁고 조립 상태가 복잡했다. 좁은 문 사이로 어떻게 침대를 빼긴 했는데 돌려도 보고 세워도 보고, 비틀어보면서 침대를 방 안으로 넣으려고 했을 때는 결국 1-2cm 차이로 들어갈 수 없었다. 침대를 조립하는 것은 전문가의 영역이라 문을 뗐다. 문 경첩을 떼자 침대가 잘 들어갔다.
놀이방에 책장만 종류별로 4가지가 있었고, 장난감 정리함, 옷 수납장 2개, 선반도 2개나 있다. 이것을 미리 아이들이 상의하여 각자 방으로 갖고 갈 것을 정했는데 아이들 방에 배치하는 것을 하니 정말 배가 너무 고팠다.
중국집에 짜장면 3그릇, 짬뽕 1그릇을 시키니 2시 넘어서 배달해 준다고 해서 좌절하며 어질어질한 상태로 쉬다가 마시듯이 짜장면을 먹었다. 이제 남은 것은 거실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각자 방에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전부 맡겼다.
초등학교 4-5학년 때 나만의 방이 생겼다. 원래 그 방은 창고처럼 사용하던 끝방으로 겨울이면 가을 햇볕에 말린 고추로 가득했다. 봄이 와서 고추를 상인에게 팔고 나면 다시 내 방이 생겼다. 겨울철 한시적으로 방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사실은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커다란 4칸짜리 창문이 있었고, 엄마 아빠가 쓰던 1칸짜리 옷장에 조명 달린 피노키오 책상, 나무로 된 높은 책장도 있었다. 3인용 소파랑 외삼촌이 사주셨던 흰둥이 강아지 인형에 피아노도 있었다. 유리문으로 된 책장엔 엄마가 동네에서 얻어돈 세계 문학 전집도 있었는데 그 책들을 한 권 두 권 읽을 줄 알던 중학교 1학년 봄에 그 방은 불이 났다. 창고에서 시작된 불이 바로 옆에 있던 내 방에 옮겨가서 그 방에 있던 새 교과서, 공책까지 불타버렸다. 겨우 피아노 한 대만 불이 크게 번지기 전에 어른들이 밖으로 옮겨서 피아노 다리 한쪽 끝만 깨지고 살릴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집을 고치면서 그 방은 안방이 되었고, 원래 안방이던 큰방을 반절로 나워 동생과 나눠 썼다.
어떻게 그 방에서 4 식구가 다 자고 살았는지 나중에 들여온 책상과 피아노 한대, 그리고 이불 한 채가 놓이면 방안이 가득했다. 새 집을 지어 이사 나오기 전 28살까지 그 방에서 계속 지냈다.
남편은 고등학교 1학년 때에서야 자기 방이 생겼다며 아이들은 이제 1학년, 3학년인데 자기 방이 생긴 것을 몹시 부러워했다. 덕분에 남편이 옷방으로 사용하던 방은 가족실로 옮기게 되었고, 너무 오픈된 상태라서 자기 공간이 사라졌다며 너무 들리게 속상해했다.
물건을 정리하며 아이들에게 추억 할머니가 찾아왔는지 물건 하나하나 차보고, 해보고, 열어보고 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또 정리 방법이 아직 서툴렀기 때문에 옆에서 도와주는 엄마 아빠의 잔소리 덕분에 더욱 더디 정리되었다. 정리가 끝난 후 오늘 어땠냐는 질문에 첫째가하는 말이
"엄마 오늘 두 가지를 느꼈어. 방이 생겨서 좋다는 것과 엄마는 정리할 때 신경질을 많이 낸다는 거야."
그만큼 무거운 침대와 책장을 옮기는 것보다 물건 정리가 더 힘들었다.
모든 정리를 다 끝낸 시각은 7시. 아빠랑 아이들을 저녁 겸 휴식의 명목으로 카페로 쫓아 보낸 후 바닥 청소, 창문 틈새 청소까지 마치니 8시가 넘었다.
비울 물건을 정리하고, 물건들이 각자 자리에 맞게 들어가니 원래 방이 어떠한지 기억이 잘 안 날 만큼 흡족하게 정리되었다. 아들 딸 모두 새로 생긴 방(원래도 있었던 방이지만)이 마음에 들었는지 문을 쾅 닫고 들어가 같은 말을 반복한다.
"내 방에 들어오지 마!"
즐거운 기분에서 하는 말이겠지만 언젠가는 다른 의미로 쓸 때가 있을 그 말 말이다.
큰 변화는 아니지만 그 부산스러움 끝에 아이들 방을 만들어주니 집은 훌쩍 가벼워졌고, 아이들은 그만큼 큰 것 같았다. 각자의 독립된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는 아이들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책임질 공간이 생긴 만큼 아이들은 혼자 있는 시간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고, 좋아하는 것에 더 몰두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방에 들어간 시간에 나도 쇼핑을 멈추고, 혼자 있는 시간(또는 남편과 둘이 있는 시간)과 좋아하는 것에 몰두해야겠다. 마지막으로 딸 방에 들어갈 책상과 시스템옷장을 가릴 가벽을 사는 것은 꼭 필요한 구매이니 눈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