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의 목적
7월 말 방학을 하고 2주 동안 수영장에 못 갔다. 친정에도 갔었고, 시부모님과 제주도 여행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수영장도 일주일은 휴가 기간이었기 때문에 나만 진도가 뒤처지진 않겠다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워서 수영장에 안 갔던 기간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도 되기에 좋았다. 먹을 것도 마음껏 먹었고 2주 동안 몸도 마음도 편했는지 몸무게도 2킬로 이상 늘었다. 제주 여행 내내 3끼 이상 잘 먹고, 중간중간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아이들 먹는 과자 아이스크림도 같이 먹었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월요일 오랜만에 수영장에 갔는데 뭔가 긴장 어린 느낌이었다. 초보 레인 회원들이 모두 선생님 얼굴만 보고 있었다. 준비운동을 마치면 출발을 하려고 앞으로 모여 줄을 서는데 웅성웅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무심히 외칠뿐이었다.
"자!~ 워밍업 4바퀴!"
회원들은 서로 얼굴을 보고 갸웃거렸지만 그대로 자유형 4바퀴를 돌았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휴가 전 7월 마지막 주 선생님이 말씀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휴가 기간 끝나고 앞에 몇 분은 중급반으로 이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속으로 내심 당연히 그 몇 분 중 내가 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야 내 입장에서는 너무 확실했다.
일단 내가 초보반 회원 중 제일 오래 배웠다. 무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배웠으니까.
모든 영법을 할 줄 알고, 매일 나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3-4번씩 꼬박 출석을 했다.
마지막으로 체력이 조금 떨어져도 초급반 회원 중 내가 어느 부분(접영 자유형)에선 제일 낫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중급반으로 올라가는 몇 명 중에 내가 속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회원들 모두 갸웃거리며 강습은 마쳤고, 선생님은 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게 오늘이 되었다.
별생각 없었는데 오늘 선생님이 회원 카드를 들고 계셨다. 그리고 사람들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초보반 스무 명 조금 안 되는 사람들이 선생님 주변으로 몰렸지만 나는 당연히 선생님이 나를 부를 줄 알고 줄 서 있었다. 그간 1달 이상 오지 않았던 사람들, 나보다 한참 늦게 들어온 남자 회원분들도, 그리고 나보다 느려서 내 손에 항상 차였던 분도 이름을 불렀는데 나는 부르지 않았다.
"자 이름 부른 분들은 중급반으로 이동하세요."
선생님 얼굴을 보고 있었는데도 끝내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기에 미지근한 수영장 물이 더워졌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다시 줄을 서고, 킥판을 나누어 들고 발차기를 시작했다.
많이 옮겨진 탓에 항상 여섯 번째 서던 내 자리가 첫 번째가 되었다. 갑자기 앞장서서 수영한 것이 어색할 법도 한데 그보다 계속 중급반 레인에 눈길이 갔다.
왜 난 아닌 거였을까?
수영을 하면서도 계속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붐비는 중급반을 보면서 그래 저기 사람 많은 곳에서 치이느니 그냥 여기서 여유롭게 하자.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도 열불이 뻗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유형, 한 팔-양팔 접영, 배영, 평영까지 모두 다 한 뒤에 이게 더워서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내 이름이 불리지 않은 서운함과 부끄러움이었는지 모르겠지만 50분 강습이 다 끝난 후 서둘러 샤워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로 열을 식혔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내가 수영을 하는 목적.
그것이 단계를 높여 상급반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심 기대했다가 보기 좋게 물먹었지만(오늘 수영장 물도 많이 먹었다.) 처음 수영장에 와서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한 가지 목적은 오래 수영을 하는 것이다.
새벽 5시에 눈을 떠서 이를 닦고, 물 한잔 마신 후 가방을 들고 나오는 그 5분을 이기지 못해서 포기한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나는 안다. 그럼에도 천천히 2년 동안 조금씩 물에 대한 공포심을 버리고, 자신감을 갖고, 하나씩 배워왔다. 내가 어디에 있던 수영을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지금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뭐 현실부정을 위한 정신승리일 수도 있지만.
샤워를 마치고 들어가는 길에 같은 반 회원 한 분이 말을 걸었다.
"중급반으로 올라가셔야 하는데 선생님이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더 열심히 하면 되지요."
말을 하고 돌아서는데 왠지 모를 섭섭함까지 없었다면 거짓말이었을 거다.
이번에 중급반으로 올라가지 못한 것은 더 배우라는 의미로 알고, 새벽에 조금만 더 일찍 가서 성실하게 다녀야겠다.
한 가지 더 든 생각! 첫째 아이가 방학식날 들고 온 생활통지표가 떠올랐다.
(생활통지표는 학교마다 항목이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교과평가와 출결, 봉사활동 및 창의적 체험활동 내용, 그리고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이 있다. 교과 평가는 대부분 3단계(매우 잘함-잘함-노력요함 ◎-○-△)다.)
교과 평가에서 당연히 모두 쌍동그라미(매우 잘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수학과 사회에서 한 개씩 동그라미(잘함)만 있었다. 초등학교 생활통지표가 그리 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초등교사인 내가 너무너무 잘하는 것이지만 딸의 성격상 뭐든 주어진 것은 최선을 다하는 아이라 결과가 의아했다. 통지표 가져오기 한 주 전에 이미 수행평가지를 확인했을 때 수학 평가지 하나에 점수가 없었긴 했다. 5개 문제 중에서 1개 반이 틀렸길래 뭘 틀렸나 보니 직각을 표시해야 하는 문제에서 아이가 표시를 정확하게 하지 않았다. 다시 공부해 보며 확인을 했는데 그 수행평가를 동그라미(잘함)로 받은 것이다.
방학날, 생활통지표를 내미는 아이도 동그라미가 있는 평가 결과가 속상했겠지만
"어? 수학이랑 사회 동그라미네?" 하는 엄마의 말에 더 시무룩했던 그날 말이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괜찮아. 평가에서 조금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되었으니까 방학 동안 공부해 보자!"라고 말했던 나였는데
내가 교사, 학부모의 입장이 아닌 평가를 받는 수강생의 입장이 되다 보니 여간 속상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선생님께 중급반에 못 올라가는 이유를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도 우리 반 23명의 노력을 모두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교사가 보는 시각과 학생의 그것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평가를 하는 입장에서 평가를 받는 입장이 되니 생활통지표를 건네는 딸의 입장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초급반이지만 이 정도면 잘하지 않나? 하는 자만심을 내려놓고, 기본부터 다시 배우고, 좀 더 성실한 자세로 수영을 해야겠다.
수영을 하는 목적! 오래오래 수영하는 것! 수영을 그만두지 않는 것! 이 하나만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