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영웅 피터에 대한 기록(1)
피터와 공부한 지 1학기가 지났다.
피터가 피터인 이유는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피터 파커를 제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학기 초부터 거미줄 쏘는 흉내를 자주 냈다. 스파이더맨이 그려진 옷을 입거나, 실내화를 신고 친구들과 악당과 싸우는 놀이를 즐겨했다.
피터를 본 첫날, 교실에 들어온 이 작은 영웅을 나는 마음속 깊이 어렵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영웅도 일상을 살아가듯이 우리 반 피터도 아이들과 조금씩 다투기도 하고, 말썽을 부리기도 하면서 그냥 웃고 지내는 많은 학생 중 한 명이 되었다. 어렵고 두려웠던 마음이 옅어지자 이제 욕심이 생긴 것 같다.
새 학기가 시작된 이후 1학기와 조금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올해의 난제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나에게 온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요일 오후 피터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2학기 시작에 하는 통상적인 상담 전화였다.
피터 학교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1학기 때 학습하는 태도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어머님, 피터가 저랑 공부할 때 많이 심심해 보여요. 교과서를 잘 보지 않고, 수업 내용에 흥미가 없어요. 그게 크게 소란스럽진 않지만 주변에 있는 친구들에게 말을 걸거나, 친구 물건을 만지니까 친구들이 불편해 하구요. 글자를 쓰거나 교과서를 펴는 것을 거부하니 수업 시간에 멍한 채 앉아있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면 졸기도 해요. 어머님 제가 피터를 위해 뭔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우리 아이가 공부에 대한 흥미가 없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대신 발음 연습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때 잘 소통되지 않으면 본인이 너무 답답해해요. 휴대폰 어플로 한 글자씩 듣고 따라 말하는 것을 재미있어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언어 치료도 받고 있고요.
가족들과 이야기를 할 때 농담도 알아듣고, 상황을 이해하는 것 같아서 의사소통이 더 원활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님 말씀을 듣자니 내가 교실에서 피터를 너무 방치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아이가 거부하고 흥미 없어한다는 이유로 보통의 아이들과 같은 교육과정만을 운영한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한 차별 없는 평등은 같은 자료를 사용하여 공부하고, 학습자료를 내주고,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싶었다.
1학년 학생들을 가르쳤을 때 사용하던 교구를 꺼냈다.
가나다 요술책 - 1학기에 피터에게 가져가 주었지만 몇 번 넘겨보더니 밀어냈음
연결블록 - 이것저것 만들기 몇 번 하고 그만함.
숫자 자석 - 책상에 붙이면서 놀았음. 숫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쌓기 놀이를 함.
색종이, 색칠놀이, 선긋기 등 아이는 손으로 연필을 쥐고 하는 일체의 활동을 거부하고, 자신감없어 했다.
다른 교구들을 찾아보다가 글자 자석이 눈에 띄었다.
1학년 때 한글을 어려워했던 아이와 가장 많이 했던 공부는 그림책을 읽고 낱말을 한글 자석으로 만들고, 10칸 공책에 쓰는 것이었다. 집에 아이들이 더 이상 보지 않는 디즈니 그림책을 몇 권과 한글 자석을 갖고 출근했다. 피터가 오길 기다렸다.
-선생님!
높은 도다. 선생님을 매우 높은 목소리로 부르고 한 손을 뻗어 흔드는 인사가 그 녀석의 시그니쳐 인사법이다.
자기 자리에 앉더니 이내 내 앞으로 와서 따로 인사를 건넨다.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거나 살짝 포옹을 하려고 한다. 오늘은 간단하게 목례다.
-피터야! 안녕? 오늘은 보물상자(글쓰기)하는 날이니까 네 거 찾아서 하고 싶은 거 해요.
말이 끝나자마자 친구들 책상으로 간다. 팔씨름을 하자며 친구에게 팔을 내밀지만 허무하게 진다.
그 앞에 있는 친구에겐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며 이름을 부른다.
친구와의 대화는 이름을 몇 번 부르는 식으로 끝난다.
그 옆에 있는 친구는 계속 바라본다. 친구에게 손가락 하트를 보낸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 안 든다.
아이를 보고 있자니 공부를 하자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때 마침 바람이 휙 불었다.
-후드득
칠판에 붙어있던 꾸밈자료 하나가 떨어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피터는 알아채고 바닥에 떨어진 자료를 줍는다. 키가 작아서 칠판에 닿지 않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붙이려고 한다.
-피터야! 선생님이랑 책 읽을까?
-싫어요.
-왜~ 이거 재미있는 책이야. 월 e, 니모, 도리 영화 본 적 없어?
-(고개 절레절레)
-선생님이 피터만 읽어주려고 가져왔는데 한번 볼래?
-(고개 절레절레)
교사용 책상과 아이 책상을 나란히 두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피터와 책을 읽는 동안 반 아이들은 선생님이 자신들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소란스러웠다.
읽는 시간이 채 5분도 되지 않게 끝나고 그림을 보았다. 한글 자석을 꺼냈다.
오늘 배울 단어는 이브이다.
-월 e 친구가 이브잖아. 이브를 이렇게 써. 이응, 이, 비읍, 이, 이브
-이브~ 이브!
-응, 이브! 피터 이름도 한번 써 볼까?
-(고개 절레절레)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 선생님 제가 해볼게요.
-피터는 이렇게 쓰는 거야.
그 사이 아침활동 시간이 끝나고 수업 시간이 되었다. 아침활동 때 아이들은 보물상자를 썼다.
우리 반은 월요일, 수요일마다 글쓰기를 한다.
오늘 주제는 나의 단기목표-중기목표-장기목표를 계획하는 것이었다.
서너 줄 쓰고 내는 아이들이 많다.
-아침에 학교 오는 거 힘들 텐데 지각하는 사람 없이 잘 왔다! 보물상자 쓰기 주제가 어려웠지?
-네! 그런데 선생님 단기가 뭐예요?
-기간에 대한 말이야.
짧은 기간 동안 해내고 싶은 일.
중기는 조금 더 긴 기간!
장기는 더 긴 기간 동안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를 쓰는 거지!
선생님은 너희들이 하루하루 열심히 공부하는 것 참 멋지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렇게 하루하루 그냥 보내는 것보다 조금 명확한 목표가 있다면 힘든 하루지만 살아갈 힘이 생기지 않을까?
선생님의 단기 목표는 피터와 책을 꾸준히 읽는 거야.
오늘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처음 시작했어. 그렇게 2학기 동안 짧게 피터와 책을 읽을 거야.
우리 같이 피터와 책을 읽자. 간단한 낱말도 피터에게 잘 알려주고.
선생님 혼자는 힘들 것 같은데 너희들이 조금씩만 도와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처음부터 잘 되진 않을 것 같다.
책상 위에 열심히 늘어놓은 글자 자석을 녀석은 원래대로 상자에 넣은 후 나에게 갖다 준다.
-싫어요!
이 경쾌한 한 마디를 마치고 친구들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