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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ug 20. 2022

토지를 읽고 난 후

토지를 모두 읽었다. 4월 말 전집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8월 14일에 마지막 20권까지 모두 읽었다. 8000쪽 가까이 되는 책을 4개월에 걸쳐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했는지 어떻게 느꼈는지 곰곰이 되새기는 시간이 필요했다.  토지는 예전에 고등학교 때 1-2권 정도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한자 제목의 두꺼운 책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용이 모두 머리로 흘러들어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하지만 책은 무거웠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많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와 무지했던 시대 상황까지 읽을수록 헷갈려서 중도에 포기했다.

그랬는데 왜 다시 토지였을까?

허영심 때문이다.

토지 전집이 안방에 턱 하니 자리 잡은 모습은 책 꽤나 읽는 사람처럼 보이게 할 터였으니까.

약간의 목돈이 생겼을 때 다른 고민 없이 토지 전집을 사고 포장을 뜯어 원래 아이들 액자가 있던 책장에 책을 꽂아 넣었을 때는 책을 읽기 전인데도 벌써 다 읽은 듯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천천히 읽어나가길 4개월.

무엇을 배우고 싶어 읽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마음속에 남은 흔적은 글로 써야 비로소 확실히 보일 것 같다.


허겁지겁 한 권 한 권 해치우듯이 읽어 내려갔다. 어떤 때는 재미있어 하루 밤새 다 읽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인물들의 사설이 너무 지겨워서 건너뛰며 읽기도 했다. 다시 돌아가서 읽을 만큼 재미있는 장면도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지나 광복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역사책을 읽은 것 같다. 다만 이 역사책은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약하고 힘없던, 그렇지만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과 눈을 담은 이야기였다.

매일매일의 크고 작은 일들, 그때의 생각과 마음, 오고가는 대화, 다툼, 기쁨, 슬픔, 분노, 서러움, 비겁함 모든 감정들이 뒤섞인 인생들이 모인 이야기.


똑똑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은 힘이 없지만 그 물방울이 모여 물줄기가 되고 돌틈을 따라 흐르다 보면 작은 개울이 되어 강을 이루고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물줄기가 되는 일련의 과정이 역사가 아닐까?

토지는 그 물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이기려고 하지 않고 어떤 때는 휩쓸려 버리고, 또 어떤 때는 무참히 깨지지만, 버티고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때마침 책을 다 읽은 날이 광복절 하루 전날이었다.

광복 77주년을 기념하는 태극기가 어디든 나부껴야 하는데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몇 집만이 세찬 바람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고 있었다.  

토지 마지막 장면은 광복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20권 내내 힘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 광복을 더욱 적극적으로 그리고 희열에 차게 서술할 줄 알았지만 광복에 대한 묘사는 짧고 간단했다.

단 두쪽이었다.

양현이 강가 모래밭에 앉아 있을 때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달려가는 길, 참으로 참으로 긴 시간이었고 그 길이 멀고도 멀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서희가 그 소식을 양현을 통해 들었을 때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를 차례로 잃고 모든 재산을 조준구에게 빼앗긴 후 간도로 도망치듯 이주하면서 서서히 자신을 옭아매는 사슬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팽팽하고 날카롭게 죄어 왔다. 길상과 결혼을 하였지만 신분의 차이에서 비롯한 미묘한 갈등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도 해결되지 못해 결국 귀향할 때도 동행하지 못하고 자식들만 데리고 와야 했으며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과 부의 축적과 재산을 위해 친일을 하는 모순된 행위에 사슬은 더욱 바짝, 팽팽하게 감긴다. 의사 박효영의 사랑과 봉순의 딸인 양현을 키우면서 점차 인간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갖고 있어도 자신의 온전한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하나의 인간일 수 없는 현실은 서희를 더욱 옥죄었다. 일제의 전시 총동원으로 온 국토가 도륙이 나고 사람들의 온 정신까지 메말라 가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사슬은 더이상 빨아먹을 게 없어 떨어져 버린다.


또 기억에 남는 장면은 토지 20권 244-246쪽은 일본에 대한 환국의 생각이다. 울분에 가득찬 언어로 침략자를 규탄하는 내용이라 속이 뻥 뚫린다.


인간이 인간을 짐승같이 도륙하고 학살하는 이 시대의 악마는 누구인가.

달을 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일본이다.

어떤 동료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늘 열기에 눈이 젖어 있던 친구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왜놈은 수천 년  역사에서 티끌 하나 우리에게 준 것이 없다. 구걸해 가져 가고 도적질 해서 우리 것 가져가고, 그들 국가의 기반이 우리 것으로 하여 이룩되었는데 그럼에도 티끌 하나는커녕 고마움의 인사말 한마디 없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 왔다. 그들의 역사는 거짓으로 반죽한 생명 없는 토우다. 그 잔혹한 종자들이 오늘 우리를 어떻게 하고 있나? 이제 우리는 생명이나마 간신히 부지했던 우마의 처지에서도 벗어나 전쟁 문자가 되었다. 전쟁 물자! 일선으로 끌려간 수많은 순결한 우리의 누이들, 그들의 육신은 쇳덩이, 기계가 되고 말았다. 고철이 되어 이름 모를 산하에 버려지고, 기계라 부를 수밖에 더 무엇으로 표현하리. 참나무같이 단단하고 오월 나뭇잎같이 싱그러운 우리의 형제들은 어찌 되었나. 그들 역시 쓰다가 고철이 되고 삭아서 탄광촌 숲 속에 굴러 있네. 일본이 패전하면 명심하고 또 명심할 일은 코딱지 하나도 그들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두 번 다시 재앙을 겪지 않기 위하여. 본래 그들은 남에게 줄 것이 없고 받아야만 하는 처지, 그러나 국으로 받아먹었나? 그들은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법칙이며 물리의 현상이다. 그런 말을 했던 동료는 역사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병 들어서 지난봄에 세상을 떴지만요. 아버지! 힘내십시오. 우리 민족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만날 것입니다.  




토지를 읽다 보면 일제가 우리에게 했던 처참한 상황들이 군데군데 묘사되어 있다. 땅을 빼앗고 거기서 나오는 곡식을 수탈하고, 사람을 빼앗고 사람들의 정신마저 갉아먹어 없애려 한다. 수천 년 이어진 우리 문화와 말과 역사를 천대하면서 이 땅에 들러 붙어서 병들게 하고  자신이 원래 주인인양 행세한다.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하나의 민족을 처절하게 36년 동안 착취했지만 결국은 살아남은 우리는 다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삶을 이어간다.


소설 중 성환 할머니, 즉 정석의 어머니는 바로 이런 탄압 속에서도 결국은 살아남았다.

남편은 조준구의 모함으로 일본군에게 총살되었고, 살아남기 위해 아들 석이는 물지게를 지고, 딸과 자신은 얼음물에 빨래를 해야 했다. 그러다가 석이 서희의 재산을 찾는 과정에서 역할을 하며 학교 공부를 마치고 선생이 되자 비로소 안정을 갖게 되지만 며느리인 양을례의 질투로 석이는 쫓기는 신세가 되고, 손자 손녀를  딸의 구박 속에서도 열심히 키운다.  가까스로 키운 손자는 징용으로 끌려가고, 손녀는 일본군에 의해 병을 얻게 되며 실명에 이르는 과정은 정말 마음이 쓰렸다.

이 모든 과정이 개인의 가혹한 운명으로 치부하기엔 그저 지나간 과거로 묻기엔 일본은 너무나 큰 잘못을 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차례대로,  잊을만하면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다.

이런 사람이 과연 소설 속에만 존재했을까?

소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심한 고통을 받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시간이 지나 극심한 고통은 사라질지라도 그 상처와 기억은 되새기고 되새겨서 각인이 되었을 것이다.

먼 옛날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100년 이쪽저쪽의 일이다. 옛 조상의 일이 아니다. 내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과연 진정한 사과를 받았던 것일까?  

우리가 과연 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책을 읽다가 내가 경상도 사람이 다 됐구나 싶었다. 쭉 전라도에서 살다가, 스무 살에 경남 진주로 가서 대학교를 다니고, 함양에서 5년을 근무한 후 결혼하고 거제로 내려온 지 8년이 되어가니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다. 토지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아주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그런데 내가 그 말을 모두는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이해하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사용했던 말도 간혹 나오고,  정확하진 않지만 대강 어떤 의미의 말인지는 문맥상 알 수 있는 말들이어서 인물들의 대화가 입 밖으로 나오면 어색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실감 나게 살아 움직였다.

이렇게 살아있는 말을 생각하고 글로 쓸 수 있는 박경리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통영에 있는 박경리 기념관에 갔었다.  

통영 산양읍에 있는 한적한 위치에 있는 기념관은 토지를 읽고 나서 가보니 기념관에 있는 글 하나하나 선생님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문학은 삶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모든 학문은 삶의 현장이며, 삶은 모든 학문의 기초입니다.

문학은 어떠한 분야도 수용해야 하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니며 사실도 아니라는 점.

그러면서도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해서 소설을 창작이라고 한다. 


그래서 토지가 하나의 역사책처럼, 우리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이야기처럼 들렸던 것일까

가짜지만 진짜 어디선가 살아있을 것 같은 마을과 그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너무 슬프고 애통한 이야기지만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말 살아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도 멈춰있지 않고 펄떡거리는 생명의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맛깔난 문장, 실감 나는 감정 묘사에 압도된다기보다 이런 글을 내가 읽을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했다.

그 느낌을 쓰는 나의 글이 너무나 모자라서 부끄럽지만 이렇게 스스로 마무리하는 글을 쓸 수 있어 다행이다. 나는 박경리 선생님의 눈으로 보는 그때의 세상을 토지라는 책으로 배웠다.

이제는 나의 눈으로 볼 차례다. 정직하고 깨끗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글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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