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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r 19. 2023

숙제를 해야 하는 이유

금요일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교실로 올라오니 운동장에 나가지 않고 교실에서 노는 아이들이 많다.

블록을 갖고 놀거나 교실에 있는 보드게임으로 논다. 복도에서 옆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잡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있다. 간단하게 양치를 하고 아이들이 신청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아이들은 선생님 책상 옆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한다. 한두 명이 옆에 오기 시작하면 또 다른 아이들도 와서 기어이 책상을 둘러싸고야 만다. 강강술래를 하자는 것인가?

아이들이 옆에 서서 이야기를 건네지만 동시에 많은 아이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누구 이야기에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선생님 강아지 좋아해요? 고양이 좋아해요?

-선생님 오늘 체육 뭐해요?

-선생님 체육 팀 어떻게 나눠요?

-선생님 화장실 다녀와도 돼요?

-선생님 아이브 좋아해요?

-선생님 이 노래 알아요?

-선생님 다음 주 월요일 급식 뭐 나오게요?


내가 어렸을 땐 선생님 책상엔 선생님이 부르시거나 심부름할 때만 갔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 책상에 볼 일이 참 많다. 볼일이 없어도 그냥 온다. 내 뒤에 서서 내가 뭘 하는지 보고 있거나 나를 뒤에서 안아준다. 그럴 때면 깜짝 놀라 점심 직후 식곤증이 달아난다. 좋기도 하지만 어색한 기분이 더 크다.  

아이들은 내가 알림장 화면을 켜자 또 질문을 한다.


-선생님 알림장 길어요?

-선생님 숙제 뭐예요?

-선생님 금요일에 숙제 내주는 건 아니죠?

-선생님 지금 숙제 바로 해도 되죠? 


아이들의 관심은 알림장을 얼마나 길게 쓸지 숙제가 있는지 없는 지다. 당연히 숙제는 없다. 금요일 알림장은 주로 이런 내용이다. 안전 교육이나 제출해야 할 서류 안내 정도. 나도 월요일 아침부터 아이들 숙제 검사로 바쁘긴 싫고 진심으로 주말에는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으니까.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금요일엔 당연히 숙제가 없지! 편하게 쉬면서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면 되는 거야.

나 역시 이번 주말은 개인적인 숙제를 끝내서 편안하다.  숙제는 교육과정이었다.

3주에 걸쳐서 매우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조금씩 나눠서 하다가 금요일 새벽에 완성했다.

2월 말 학년 연구를 한다고 번쩍 손을 들었다. 우리 학년은 4명의 선생님으로 두 분께서는 다른 학교에서 전입해 오신 분들이라 내가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


학년 연구라고 거창하지만 해야 할 것은 딱 하나!

학년 교육과정을 만드는 일이다.

학년별 연간 시수에 맞게 반별시간표를 맞추고 나이스에 편차가 없도록 시수를 입력하고 그에 맞게 학습 내용을 조절하여 입력하면 된다.

그렇게 하려면 일단 올해 우리 학교 교육과정상 행사가 언제인지, 행사에 배정된 창체(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이 몇 시간인지 알고 그에 맞체 행사 일정을  잡고 행사 시간 제외하고 나머지 교과 시수를 조절하여 입력하면 되는 것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일단 학교 행사가 너무 많다.

시업식부터 시작해서 3월 둘째 주부터 행사 폭탄이다.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그렇게 많을까 싶지만 이렇게나 많다.

 3-4월에 배정된 행사만 해도 이 정도이다. 각 행사마다 범교과 교육과 안전건강 교육 시수도 필수로 집어넣어야 한다. 행사마다 해야 할 안전 교육은 왜 그렇게 많은지. 이렇게 행사 일정에 맞게 창체 시수를 배정하고 범교과(7대 안전교육 등) 교육 내용도 넣다 보면 큰 틀은 잡혀 간다.


그다음 나이스에 들어가서 학년 편성 시수 입력하고 기초 시간표 적용을 한 뒤 들쑥날쑥한 시수들을 가지런하게 편차가 없도록 조절을 하고 각 교과마다 학습 내용을 등록한 후 주간 학습 등록을 하면 나이스 작업은 끝난다.


그 이후에 교과 재구성(시수 증배), 학년 교육과정의 특색, 학년 중점 과제,  평가 계획 등을 설정하고 학년 교육과정 양식에 맞게 편집을 잘하면 진짜 끝인데 이렇게 2월 말부터 조금씩 작업을 했다.


금요일 출근길에 다른 학년 연구 선생님과 만났다.

선생님왈

-교육과정 어디까지 하셨어요?

-일단 대강은 끝냈는데 다시 한번 봐야죠.

-헉. 나는 아직 안 했는데.. 언제 다 하셨어요?

-천천히 하면 되지요. 저도 진짜 천천히 했어요.  


끝낸 자의 여유를 한껏 부렸지만 사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새벽 4시마다 일어나서 조금씩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과 시간에는 할 시간도 없고 수업 끝나고 시간이 좀 있다 해도 학기 초에는 학년 회의가 많기 때문에 학교에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에 와서도 당연히 할 짬이 나지는 않는다. 퇴근 이후에는 집안일을 해야 하고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 또 있으니까.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고요와 집중의 시간은 새벽뿐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만들었다 해도 사실 이 교육과정을 제대로 보는 사람은 몇 없다.

나 그리고 학교 연구부장. 학년 부장정도이지 다른 동학년 선생님들은 반별시간표 맞추는 것만 하시고 내용까지 자세히 보시지는 않는다. 이유는 이런 교육과정은 사실 문서로서의 역할만 있다.


선생님은 선생님 자체가 하나의 교육과정이다.

 각 반은 이런 통일된 교육과정으로 운영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선생님 고유의 교육관이 담긴 교육과정은 문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매 수업, 수업의 분위기, 선생님이 그 해 꼭 아이들과 해보고 싶었던 내용, 선생님이 중점적으로 교육하고 싶은 분야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의 교육과정을 명시하고 이대로 운영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것은 교사 개개인의 개성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교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움직이는 교육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교육과정을 만드는 이유는 국가 교육과정에 따른 학년이 이수해야 하는 성취기준과 학년별, 영역별 편성 시수, 안전교육 시수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년에서 공통적으로 진행하는 기본 교육 내용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가이드라인인 것이다.  

교육과정을 만들다 보니 참 해야 할 것도 많고 가르칠 것도 많다. 수업도 해야 하고 이런 행사들도 하다 보면 올해도 금방 지나갈 것 같다.


다시 금요일 오후. 아이들은 알림장을 쓴다. 숙제가 없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잔소리로 할 내용은 알림장에 적다 보니 내용이 좀 길었던지 오늘은 몇 줄이네. 어제는 몇 줄이었네 자기들끼리 구시렁대는 소리가 크다.


길고 길었던 숙제를 드디어 끝내고 맞는 주말. 숙제를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따뜻하고 화창날 날들을 무겁게 보내야 했을 것이다. 숙제를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 이번 주말은 더없이 편하게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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