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use me~실례할게요"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때에도, 마음을 달래는 브런치작가로 남길..

by 김윤정

딸부잣집 셋째 딸로 태어나 누나 셋을 가진 내 동생의 막내누나 자리인 나는 터를 잘 팔고 나왔다는 할머니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예쁨을 받았다. 차별은 없었고, 다복했고, 우리 넷 모두 자기 이야기를 해대느라 늘 시끄러웠다. 우리 집 딸들은 예쁜 여자가 되는 것보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경험을 지향했다.

대학졸업 후 S그룹에 입사했고 우수인력공모전으로 컨설팅팀에서 일했다. 잦은 해외출장으로 쌓이는 마일리지를 멋이라 생각했고, 생기는 기회마다 마다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빅4컨설팅펌으로 이직하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미련 없이 일하다 미련 없이 그만뒀다. 그때 나는 서른다섯이었다.

이제와 내가 했던 많고 굵은 프로젝트들의 내용은 하나도 중요할 것이 없겠지만 나의 한창때였던 그 시절의 열정, 그 시절의 치열함이 대부분은 뿌듯함으로 때로는 처연하게 내 안에 남아있다.


한반도의 거.의. 끝자락에서 아줌마 생활을 한지도 어느새 9년이다.

분명 서울을 떠날 때 내가 사는 지금 이곳은 기차역도 세 개나 있는 일일역세권이었는데 상경(上京)이 이리도 힘든 일이란 걸 나는 정녕 몰랐다. 기차역도 그대 로고 기차 편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내가 문제다. 아이의 하교 시간과 아이의 간식과 그리고 우리 가족의 저녁메뉴가.. 방학이면 찾아오는 설거지 지옥이.. 그 지옥을 지옥이라 명명하면서도 진정으로 탈피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 있어 행복하다. 그래서 그간의 나를 위한 공부가 아깝거나 헛되지 않았다.'라고 여기는 나의 태도가 나를 이곳에 계속 머무르게 한다.


그렇다고 뾰족구두에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경추에서부터 힘을 주던 그때가 그립지 않은 건 절대 아니다. 어느 날은 사무치게 그립고 그 그리움이 나를 괴롭게 하는 때가 있다. 남에게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이 그러려니 넘어가는 것보다 훨씬 쉬웠던 내가 분쟁을 피하는 방법으로 치사스럽게 '네네~'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시쳇말로 급현타가 온다. 그렇게 마음의 동요가 일 때 단정하고 소박하게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는다. 노트북을 열어 북마크에서 브런치를 클릭하고, 어떤 나를 기록할까 생각하면 나의 과거와 나의 미래로 말미암은 오늘을 풀어내는 것이 좋다.


나의 별것 아닌 아픔이 가족의 관심이었던 10대-가령 발랜타인데이에 내게 초콜릿을 받아간 그 남자아이가 화이트데이에 나에게 기별이 없어 우울한 낯빛으로 방에 들어가 있는 나를 엄마, 아빠, 큰언니, 작은언니 각자가 속삭이는 4번의 “괜찮아 야, 니 매력을 아직 잘 몰라서 그래!” 그리고 남동생의 “크크크크”.

나의 책임이 나의 노력이 나의 멋이고, 나의 경쟁이 나의 승리가 나의 성과이자 스스로의 증명이었던 20,30대를 지나 그 어느 때 보다도 열과 성을 다 하지만 그 과정에 내가 있을 뿐 결과는 내가 아닌 이 이상하고도 요상한 40대.

40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아이들에게 곧 다가올 10대를 생각하며 나의 10대를 떠올리고 그렇게 돌고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나의 기록에 더 정성을 들이게 된다.


갓 서른이 됐을 때 혼자서 인도를 여행했었다. 바라나시에 도착해서 갠지스강을 찾아가는 중에 높은 벽과 좁은 길에 이유 모를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 그 좁은 골목에 골목을 점령한 소들만 있었다면? 길의 주인인 양 드러누워 꼬리를 흔들며 파리를 쫓는 건지 나를 쫒는 건지 모를 그 소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서로 어색한 웃음으로 "excuse me"를 속삭이던 다른 여행자가 없었다면?

두렵고, 무섭고, 심지어 냄새도 나고, 무엇보다 외로워서.. 그 새벽 갠지스강이 보여준 고요하고도 냉정한 절경을 마음에 담아 갈 수 없었겠지..


나의 경험이, 나의 일기가 누군가에게 ‘나도 꼭 같진 않지만 비슷한 걸 겪고 있어~'정도의 작은 ‘excuse me’로 남았으면 좋겠다. 냉소적이라는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시니컬하다는 말은 수시로 하는 활자를 좋아하는 10대에게, 본인의 인생의 주체를 찾고 있는 20대에게, 인생의 치열함을 최대로 끌어내어 하루하루 전투 중인 30대 에게, 엄마나 아빠이거나 혼자만의 인생을 즐기고 있는 40대에게, 70이 되어도 계속될 나의 기록들이 그들 각자에게 무섭고 두렵고 짜증 나는 이유가 일말의 외로움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누군가는 한 번쯤 다 겪은 일이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나는 지금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의 오늘을 열심히 겪어내며 나의 흔적을 남기는 중이다.

나의 흔적이 오늘을 어제로 지낸 나에게, 또 각자의 새로운 오늘을 겪어내고 있는 성실한 어떤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고마워요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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