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도 평화로운 세상이었던 것을

파트너 다이어리 8일차

by 이너픠스

1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면서 뜻하지 않은 휴가를 얻었다. 어떤 곳에도 적을 두지않은 오롯한 백수생할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연수원 입소를 기다리던 때가 마지막이니 10년이 한참 넘었다. 가장 큰 차이라면 그 때는 나 혼자였고, 지금은 아내와 아이가 내 곁에 있다는 것.


운이 좋게(?) 4월 봄날에 퇴사한 덕에 거리만 나서면 봄날의 햇살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사무실에, 조사실에, 법정에 틀어박혀 점심 식사 때나 잠깐 쐬던 봄날 햇살을 맘껏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무실에 가긴 너무 아까운 날씨다"고 외치면서도 다시 사무실로 끌리듯 들어가서는 해가 지고도 한참 두에서야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오전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아내와 삼청동 카페로 향했다.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편하게 봄날의 햇살을 즐길 곳을 찾았던 것 뿐이다. 카페에 나란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원래 서울이 이렇게 평온한 곳이었나 싶은 괴리감이 들었다. 관광을 온 듯한 외국인들, 엄마와 아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들...아무도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한가롭게 신발을 끌며 웃음을 머금은 채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그리고 바라봐 왔던 서울은 정신없는 출근길, 쓸려가는 듯한 퇴근길, 쉴새 없이 울리는 전화통, 짜증섞인 메일, 길게 늘어선 점심 줄...이건 그저 내가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지 본래 세상이 그런 모습이었던 건 아니었다.


겨우 가족과 시간을 보낼 여유를 찾는 건 땡볕이 아스팔트를 강타하는 여름 휴정기나 체온을 유지하는 데에 온몸의 열기를 다 써야하는 겨울에야 찾아오는 법원의 인사철 뿐이었다. 일하기 힘든 시간이라 휴가철이란 이름으로 쉬는 만큼 이 때는 놀기도 힘든 시간이다. 그런 날들에 북적이는 맛집과 공항을 찾아봤자 봄날의 삼청동 카페에 가득한 여유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사회생활이라는 걸 10년 가까이 하고서야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는 데 씁쓸함을 느끼며, 뜻하지 않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나만의 서울"에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마저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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