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학폭위 세상을 나오며

by 목동의 밤

폭력을 당한 피해자에게 가장 괴로운 감정은 무력감과 자기혐오다.

아이러니하게도 은호와 나는 학폭위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이 힘든 감정을 느껴야 했다.

진행 과정 어디에도 피해자를 위한 배려는 없었다.


경찰 조사를 받고 심리상담사를 만나고 변호사를 만나며 은호는 그제야 “엄마 이제 안심이 돼” 편안한 미소를 지었더랬다.

그런데 학교폭력 조사관 조사와 심의위원회를 거친 아이는 분노와 답답함을 호소하다 다시 동굴 속으로 숨어 버렸다.

차라리 화라도 냈다면 좋았을텐데…

학폭위 이야기만 나오면 아이는 갑자기 딴청을 하거나 자리를 피하는 등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도망쳤다.

수영장 폭력을 겪은 직후 보인 반응과 똑같았다.


부모인 나 역시 그 일을 겪고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학교폭력 신고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 가족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살려달라”는 외침이자 비명이었다.

세상에 보내는 구조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폭력 신고로 우리 가족에게는 또 다른 트라우마가 생겨 버렸지만.


올해 1~2월 사이 소년재판이 끝났을 거라 예상된다.

민사로 가해자 부모들에게 그동안의 아이 치료비와 변호사 상담비, 그간 우리 가족의 고통을 보상받으라는 지인들도 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강준이, 희준이 둘 다 가정법원으로 송치됐고 학폭위에서도 한 명은 처분을 받았기에 민사 승소 확률은 90% 이상이라고 들었다.

또 소년재판에서 가해자들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민사재판 과정에서 알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어쩌면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에겐 가장 가혹한 벌이 될지도 모르겠다.

학폭위와 형사고소를 진행할 때도 눈 하나 꿈쩍않던 사람들이다.

가해자들이 어려서 처벌은 미미하더라도 그토록 사랑하는 자기 아이들이 교육청 심의위원회에 가야 하고 법정에 서야 했다.

그런데도 아이들 부모에게선 일절 연락이 없었다.


은호와 나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느니 자기 아이들이 경찰 조사를 받고 재판장에 서는 쪽을 택한 사람들이다. (아이들 보호보다 자신들 자존심이 더 중요해서 이렇게 한결같은 태도인 건지, 아니면 정말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해서 사과하지 않는 게 아이들 교육에도 맞다고 판단한 건지...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다.)

민사로 은호의 치료 비용과 소송에 수반된 모든 비용, 정신적 보상금을 요청해도 지금 같은 태도로 일관할 수 있을까?

그때도 그들이 지금처럼 묵묵부답일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결정을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이 싸움이 내 자신도 갉아먹고 있다고 느껴서다.

장장 6개월이 넘게 온 세상과 싸워왔다.

세상을 향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응당 마땅한 대응이었으나 긴 싸움에 너무 지쳤고 스스로가 한없이 소모되는 기분이었다.


민사소송을 고민할 즈음 싸움과 복수에 쓸 에너지를 좋은 쪽으로 쓰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다.

이를테면 학폭위 제도 개선에 관한 글을 써서 공익 차원에서 일조한다던가 학폭위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준다던가 하는 일들 말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쪽이 행복하고 편하다.

한평생 그렇게 살고 싶지만 세상사 마음 같지 않다는 게 슬프다.


여전히 가해자 부모들이 너무 괘씸하지만 싸움을 위한 싸움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엔 내 시간과 소중한 일상이 너무 아깝다.


그들과 소모적 싸움을 할 시간에 은호의 눈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은호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

소송으로 신경 쓰고 마음 졸일 시간에 은호랑 행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쪽이 아이와 내 영혼에 더 이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망설이고 있는 걸 보면 나는 아직도 분노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 두편의 칼럼을 써보자, 시작한 글이 60여편에 이르는 긴 글이 됐다.

우리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기까지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위로가 필요한 분들께 모쪼록 내 진심이 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글을 쓰는 몇 달 동안 느낀 치유의 경험이 글을 읽는 분들께도 일어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마지막으로 벼랑 끝에 서있다고 느낀 우리 가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은호를 꺼내준 최정금 심리상담사님, 나와 함께 울고 함께 분노하셨던 박서연 심리상담사님, 변호사이기 이전에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김 변호사님, 송 변호사님, 자기 일처럼 알아봐 주시고 도움 되는 정보를 주려 노력하셨던 학교폭력상담전화 117의 상담사분들, 수사 과정에서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해 주셨던 수사관님, 심의회를 마치고 무작정 전화를 걸어 펑펑 울며 오열하던 내게 피해자 지원 프로그램 안내와 위로의 말을 건넸던 푸른나무재단의 상담사님, 그리고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의 우리 지역 센터장님과 운영진들, 이시원 심리상담사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바쁜 일상 중에도 시간을 내 우리 일을 알아봐준 내 고마운 친구들 효주랑 현경, 내 후배 샛별, 기도로 응원해준 많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미처 이름을 다 적지 못했지만 길고 힘든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준 친구들과 지인들, 상담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던 변호사님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학교폭력 피해자 분들께

이 글을 쓰면서 내심 그분들께 죄송했다.

심각한 사건도 많고 큰 후유증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도 많은데 그런 분들 앞에서 힘들다, 억울하다며 설익은 투정을 부린 것 같아서.

그럼에도 용기내 글을 쓴 이유는 우리 사건이 현재 학폭위 제도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도의 도움을 받기 위해 문을 두드린 피해자들이 미숙한 제도 운영으로 두 번 세 번 상처받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시작했다.


힘든 일을 겪으셨던 분들 모두, 그리고 우리 가족도 이제는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의 서툰 글이 피해자와 가족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 힘든 시간을 통과하시는 분들께는 부디 지혜로운 선택을 하시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주 번외편(1), (2)를 끝으로 그동안의 학폭위 글 연재는 마무리됩니다.


※ 번외편(1)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s://brunch.co.kr/@629e9b5d75b242a/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