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4

관계에 균열이 생길 때

by 경미리

사무실에서 준호는 모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다.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고 본일 일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일도 잘 챙겼다. 거의 20년 넘는 시간을 같이 해온 직원들이라 준호는 쓸데없는 긴장을 할 필요도 없고 회사에 출근하면 마음이 평온했다. "준호형 오늘도 간단하게 저녁에 한잔 괜찮죠?" 퇴근시간이 다가오면 준호 옆자리의 후배 민수대리는 술자리 바람을 잡았다. "그러자." 준호는 격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민수가 매번 만드는 그 자리가 즐거웠다. 간단한 술자리 끝에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창유리에 비친 준호의 모습이 비겁하다는 느낌이 간혹 들었지만 흑화 된 영미를 핑계로 가족 간의 갈등상황이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위안을 삼았다.


준호는 아득바득 사는 영미가 이해가 안 되었다. 회사를 관두고 공무원 준비를 한다고 할 때 자신의 능력을 너무 폄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준호가 그리는 가족은 네 가족과 엄마를 모시고 단란하게 사는 것이었다. 준호 눈에는 영미가 욕심이 많은 아줌마가 되어 자신뿐만 아니라 준호 본가족까지도 무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안 도움 없이 집 장만 한 거는 내 주변에 나밖에 없어, 우리는 열심히 돈을 모아야 아이들도 대학에 그나마 보낼 수 있는데 집에서 살림만 하고 어떻게 그게 가능해? 어머니한테 돈도 부쳐 드려야 하고 정말 당신은 현실 감각이 없어." 영미의 단골 레퍼토리다. 몇 년 전에 장만한 집은 영미의 큰 업적이었다.


"형 미안해. 형수한테도 그렇고 면목이 없네... " 오랜만에 준수가 연락이 왔다. "괜찮아, 천천히 다른 일 알아보고, 재수 씨는 이혼하겠다고 계속 그래?" 뜸을 들이던 준수가 대답 헸다. "응" 준호 역시 예상한 답이었지만 마음이 안 좋았다. "형, 사업 실패하고 형까지 내 빚을 물고 있는데 와이프라고 붙어 있고 싶겠어?" 준호는 혹시 준수가 나쁜 마음을 먹을까 두려웠다. "자식, 사업이란 게 하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지.. 힘내고.. 엄마걱정을 하지 망고 몸이나 잘 추스르고.." "응 고마워 끊을게." 통화를 끝내고 준호는 끊었던 담배 한 대가 몹시 피고 싶었다. 준호에게 준수는 애틋한 동생이지만 지금은 더 해줄 게 없었다. 카드빚을 갚아주는 것 말고는...


주말에 집에 있으면 동희와 영미의 기싸움에 준호는 답답함을 느꼈다. 어차피 동희는 잠을 자면서 공부는 안 할게 뻔한데 영미는 기를 쓰고 아이를 깨우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 거의 루틴화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삐뚤어진다는 느낌을 받은 준호는 영미가 돈 벌기보다 아이를 돌보는데 더 신경을 써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들에게 다가가려 게임팩을 한번 사주었다가 영미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한 적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갖고 싶은 것을 사주고 싶은 것이 준호의 마음이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물질적인 것이라도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영미는 점점 드센 장모를 닮아가는 것 같았다. 새벽이면 일어나서 아침밥을 꼭 준비하는 영미를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보다 그 밥을 먹고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유례없는 가뭄으로 준호는 동료들과 간단하게 가지던 술자리가 잠정적으로 사라지면서 이른 귀가를 하기 시작했다. 영미는 밀린 업무로 야근이 잦아졌고 늦은 시간 들어오는 영미를 보면 이러다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문득 들기도 했다. 갱년기를 맞은 영미의 얼굴은 푸석하기 그지없었다.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드세다고 느낀 영미가 한풀 꺾인 모습으로 들어올 때 따뜻한 밥이라도 먹이고 싶어졌다. 결혼 전에는 준호의 원룸에 영미가 오면 계란말이와 김치찌개를 해주곤 했다. 준호 친구들도 좋아하던 메뉴였다. 오랜 자취생활 끝에 탄생한 레시피라 인기가 좋았다. 준호는 오랜만에 주방에 들어가 저녁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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