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접 댓글로 이벤트에 당첨되었을 때, 최애의 라이브 방송에 열렬히 하트를 누를 때. 혹여나 나의 다소 날것의 순간을 발견한 지인이 있을까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2000년생 나에게 라디오는 그런 순간들로부터 너무나 자유로운 영역이다. 사회적 체면을 버리고 버려도, 좀처럼 누군가에게 발각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디어학과에 2년을 다녀본 후에도 그대로인 명제. 나의 주변에는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당연하다. 나도 라디오를 매일 듣지 않는다. 그렇지만 라디오를 좋아한다. 모순적인 이 논리를 청취자가 되어 본 사람은 분명 이해할 것이다.
처음으로 들은 라디오가 바로 MBC FM4U의 <푸른밤, 종현입니다>, ‘덕심’으로 시작했다. 그저 DJ의 팬이라 따라온 중학생에게 자정의 라디오는 참 생소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성큼 가까이 와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단다. 라디오 때문에 매일 밤을 새우니 하루는 엄마가 “그거 10시로 개편하라고 전해 줘!” 하셨다.
그걸 별생각 없이 써서 보낸 게 첫 ‘문자 읽힌 날’이었다. 읽히고 싶어 애쓴 문자 말고, 마음대로 풀어낸 이야기가 6월 26일 푸른밤의 한 조각이 된 거다. 느슨해진 집중력을 뚫고 귀에 꽂히는 내 전화번호 뒷자리, 라디오에서 처음 만난 짜릿한 순간이었다. 이후로 라디오가 가진 매력을 차근차근 만나면서, 관심이 가는 라디오 방송엔 종종 찾아가 보는 ‘청취자’가 됐다.
대학생이 되고 <푸른밤, 옥상달빛입니다>를 종종 듣는다. 친구들은 밤의 라디오를 #잔잔 #감성 #위로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물론 두 디제이는 청취자에게 필요한 공감과 조언, 응원의 말을 센스 넘치게 건넨다. 그러나 푸른밤은 뻔하지 않다. 늦은 시간 편성임에도, 동시간대 타 프로그램보다 다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늑함과 재미를 둘 다 확실히 챙기는 것, 푸른밤의 스타일이다.
"디어클라우드에게, 아니 디어클라우드의 하루만큼 강해진 너에게 듣고 왔습니다."
"디어클라우드에게 할 얘기 있어요?"
"아니요 아는 사이니까 따로 할게요."
밤에도 옥상달빛은 티키타카 맛집으로 소문날 만한 만담쇼를 펼쳐준다. 그들의 ‘오디오 비지 않는’ 대화는 Z세대에게 딱이라 일단 켜면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다. 푸른밤의 코너들도 각각 분명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라디오의 전통, 고민상담소 재질의 ‘라디오 참견 시점’, 치열한 선곡 대결로 활기가 넘치는 ‘선곡 인 앤 아웃’. 현생을 살며 멀티태스킹하는 청취자 니즈를 정확히 알고 2배속 노동요를 틀어주는 ‘푸른밤 야간작업’까지. 정체성이 분명하고 청취자에게 필요한 코너들은 다른 라디오를 둘러보았을 때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그렇지만 푸른밤마저도 ‘라알못’ 친구들이 가끔 추천을 부탁하면 마구 추천하진 못한다. 라디오는 2021년의 콘텐츠 소비방식과 이미 세대차이가 나서다. TV 방송, OTT 콘텐츠, 짧은 유튜브 영상에 비하자면 Z세대는 라디오를 들을 이유가 없다. 영상이 10분만 넘어도 루즈하게 느끼니 알짜배기만 모은 ‘오분 순삭’ 같은 채널이 생겼다. 우린 웬만한 자극에 익숙해졌고, 한눈에 클릭할 썸네일이 난무한다. 새 세대와 라디오 사이 간극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럼 라디오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mini와 같은 어플로 접근성이 나아졌고, ‘봉춘 라디오’의 유튜브 채널과 SNS 계정이 생긴 지도 꽤 됐다. 이렇게 점점 가까운 플랫폼으로 다가가면 신세대와 보다 친해질 수 있다. 또 지나치게 사연 중심적인 방식을 탈피하고, 해외 시장처럼 장르 세분화, 전문화된 라디오 채널로의 다양화를 꾀할 수도 있다. tv 방송들이 유튜브에 새 채널을 열었듯, 요약 클립으로 제공되는 보이는 라디오가 친숙함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볼수록 드는 생각. ‘라디오는 라디오인데요..?’ 라디오는 소리와 시간의 콘텐츠이다. 핵심요약이 아니라 긴 러닝타임에 유연하게 늘어져있는 소소한 소리들. 그날 이야기가 2시간 내내 마음에 닿길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일 그 시간 그 자리에, 언제든 찾아갈 수 있게 시간을 소리로 채우며 존재한다. 이 방식이 라디오에 진심들이 난무하게 한다. ‘사람들의 속 얘기를 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보이지 않는 전파로 주고받는 어떤 마음들이 있다. 모두가 멈춰 하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 소리뿐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치 함께하는 물리적 공간이 있는 듯한 공감각. 라디오는 분명히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감각’인 거다.
그러니 라디오는 경쟁력이 없는데 있다. 시청각 콘텐츠와 견주었을 때의 단점은 동시에 강점이다. 그래서 라디오에게 빨리 시대에 맞춰 극적인 변화를 꾀하라 하고 싶지 않다. 실제로 오디오 콘텐츠의 진가는 새 세대에게도 잔잔히, 조금씩 전달되고 있다. 공백을 못 견디는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인들은 적당한 밀도의 오디오 콘텐츠를 찾고 귀에 꽂기 시작했다. 라디오는 급변할 필요가 없다. 다만 편성에 적절한 코너와 텐션, 음악과 말의 비율 같은 고민처럼, 지속적인 숙제를 버무려 각 프로그램의 색깔을 확고히 하길 바랄 뿐이다. 푸른밤처럼 말이다. 매일 똑바로 앉아 듣진 않아도, 자주 꼭 찾아가고 싶도록 말이다.
라디오에 대해서는 편을 들게 된다. ‘좀 지루할 순 있는데... 좋다니까!’ 말하게 된다. TV 방송에 대해만큼 비판적일 수 있도록 라디오가 다시 커졌으면 한다. 그래서 라디오 이야기를 쉽게 했으면 한다. 눈과 손으론 할 일을 하며 틀어둔 라디오에서 취향의 노래를 마주치는 순간, 여과 없이 써 내린 문자가 읽혀 몸이 멈추는 순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사연에서 느껴진 진심이 일상에 박히는 순간. 라디오가 주는 특별한 감각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