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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그를 이은 개신교에만 있는 원죄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원죄’라 한다. 선악과란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지혜’를 주는 과일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죄라니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선과 악을 구별해야 올바른 생각을 하고 바르게 살 수 있지 않은가. 동물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한다. 아무튼 한 인간이 과일 하나 잘못 먹었다고 전 인류가 원죄를 물려받았다. 그리스도교 내에서는 신앙이지만 밖에서는 어이가 없다. 종교란 원래 그렇다. 종교 간에도 상대방 종교는 이상해 보인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죽는 것은 아담과 이브가 죄(원죄)를 졌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본적도 아는 바도 전혀 없는 최초의 인간이 단 한 번의 죄로 모든 인간은 죽는다! 대체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무엇이기에 이런 믿음을 갖게 된 걸까? 우선「창세기」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역사적으로 일어난 실제 사건으로 기독교는 본다. 로마가톨릭과 이를 이은 개신교는 이 이야기를 실제 있었던 역사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왔으므로 구원을 받으면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을 했던 개혁가들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오랜 세월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런데 유독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였다.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사실 원죄 개념은『성서』에서 명확했던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엄밀하기 못했다. 원죄 관념은 기독교 발생 이후 첫 4세기 동안 발전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5세기에 그것을 더 ‘개발해냈다.’ 원죄설은 인간의 육체를 부정적으로 여겼던 고대인의 생각이 반영되었다. 순수한 신앙의 교리가 아니었다.


초기 교회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도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지 않았다면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고 가르쳤다.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어 죽음의 처벌을 받으며 그로부터 태어난 모든 인간이 죽음의 처벌을 당해야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학자인 안셀무스(St. Anselm, 1033~1109)는 그의 저서『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신이 영원한 복을 누리도록 고귀하게 창조한 인간이 아무런 잘못 없이 죽음의 고통을 당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신의 지혜와 정의에 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죄를 지지 않았다면 죽지 않음은 당연하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졌다는 얘기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칼뱅은 이점을 다시 확인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우리의 죽음은 죄로 인한 것이며 그 죄란 인간이 창조자인 신을 배신한 불행한 경과로 예수의 피에 의한 구원을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우리가 다가올 공포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신의 자비로운 심판뿐이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유대교와 동방정교회에서는 에덴동산 이야기를 절대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다르지만 그 맥락을 이어받았고, 동방정교회는 유럽 동쪽의 기독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왜 그런지 한 단면을 알 수 있다. “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바로 살면 바로 산 보수를 받고, 못된 행실을 하면 못된 행실의 보수를 받는다.”(에제키엘 18.20.). 오히려 원죄를 부정하는 내용이다. 인간 세상에서도 연좌제는 인정되지 않는다. 연좌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본 적도 없는 조상의 죄가 ‘유전’되어 죽음을 겪게 했다는 신은 ‘사랑’의 신일 수가 없다. 진화론으로 보아도 단 한 사람의 조상으로부터 인간이 유래한 것도 아니다.


『구약』만을 정전으로 하는 유대교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죄 교리가 없다. 그렇다면 후대의 그리스도교에서 원죄교리가 ‘창조’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유럽동부의 그리스도교인 정교회에도 원죄교리가 없는 것도 아이러니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설명하다. 아무튼 유대교는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죄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원죄라는 개념은 없다. 유대인들에게 죄란 현재의 죄이다. 유대교에선 현재에 충실하지 않는 삶이 죄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이 죄다.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한 것이 죄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내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죄인 것이다.


로버트 프라이스(Robert M. Price)는 “흥미롭게도 유대교는 원죄를 믿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개인 안에 둘의 경쟁을 주셨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만화에서 어떤 사람이 윤리적 갈등에 빠졌을 때, 한쪽 어깨에는 작은 악마가, 다른 한쪽에는 작은 천사가 앉아서 그 사람을 유혹하는 장면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늘 열려 있는 선택이다. 그 결과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가 죄를 선택했을 때, 유대교는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을 믿을 수 있다. 그게 전부이다.”라고 말했다. 유대인은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설령 죄를 선택하더라도 종교적·법적 절차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장 28절).”라는 구절에 따라 출산을 무엇보다 우선시했다. 그러나 과거 기독교인들은 아담과 이브의 죄가 성교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 부부간의 성행위까지 자제하는 금욕주의적 생활로 나아갔다. 같은 뿌리를 가진 종교가 이렇게 달라졌으니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갈라서게 했을지는 참 아이러니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책이 하나 있다. 고 옥한흠 목사의 아들 옥성호가 쓴『신의 변명』이다.『신약성서』특히 바울의 여러 서신과 여러 복음서가『구약성서』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공통점이 거의 없으며『신약성서』를『구약성서』의 연속이 아닌 단절로 본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듯하지만, 전혀 다른 종교이다. 그래서 히브리『성경』과『신약성경』을 함께 묶어서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유대교의 구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로부터 구원이 아니다. 유대교에서 구원은 ‘당면한 현실의 위기’로부터 구원이다. 원죄가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도 원죄 사상이 없다. 이슬람교는 아담이 용서받았으며 그의 자손에게 원죄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기독교 중에서도 유럽동부의 기독교인 동방정교회에도 원죄 개념은 없다. 로마가톨릭과 그것을 이은 개신교에서만 원죄교리가 남아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것은 단 한 사람, 바로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이다. 5세기 초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란’ 많은 해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보통 신자라면 또는 성직자조차도 모르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자.


『신약성경』에서 아담과 하와는 바울이 쓴「로마서」와「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다. 바울서신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다! 바울은「로마서」와「고린도전서」에서 아담을 예수와 평행시키기 위해,「고린도후서」에서는 교회의 질서를 말하기 위해 끌어왔다.『신약성경』에서 바울은 ‘죽음은 죄에 대한 처벌’이라고 주장하였다. 바울에 의하면 인간이 죽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뚫고 들어왔습니다.”(로마 5.12.) 즉 아담의 원죄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이로부터 구원도 도출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으니) 역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이가 죽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1-22.)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극복하여 인간을 구원했다는 맥락이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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