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자연선택 된 할머니의 사랑과 고통



폐경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침팬지와 고릴라, 그리고 바다의 들쇠고래와 흑범고래, 범고래(이빨고래), 외뿔고래, 흰고래에서만 관찰된다. 할머니 가설은 포유류 때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폐경 후 네 가지 생식호르몬 중 두 호르몬이 감소하고 나머지 두 가지가 급증한다. 침팬지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인간은 생물학 상 유인원에 속한다.


인간은 오래 살고 자녀를 오래 동안 양육하고 교육한다. 노년이 되어서는 손주들을 돌본다. 양육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자녀와 손주세대로 전승된다. 수명이 길어져 중년과 노년이 늘어나고 한 사람의 일생동안 축적된 지식이 언어를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이를 통해 예술, 과학 등의 발전을 가져오고 문명이 탄생하게 되었다. 인류학자들은 이를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라고 부른다. 폐경 이후에도 살면서 자녀를 양육한다. 물론 집단을 이루고 인간보다 오래 사는 동물들도 있어 수명만으로 인간문명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인간의 지능이 높아졌고 동시에 수명이 늘어났던 것이 문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2023년 범고래도 폐경이 지난 후에 수컷 범고래를 보호한다는 연구가 나왔다. 수컷만 보호하는 것은 암컷들과 번식할 수 있는 수컷이 유전자를 물려주는 데 더 유리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고래에게도 남아선호가 나타난다니 흥미롭다. 폐경 이후 어미 범고래가 수컷 범고래를 지켜 생존율이 높아진다. 범고래 암컷은 90세까지 산다. 암컷은 폐경 후 20년을 더 산다. 폐경이 지난 어미는 먹잇감이 어디 있는지 무리에게 알려주고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절반 이상 나눈다. 범고래 무리를 폐경이 지난 할머니가 이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5년 연구에 의하면 폐경이 지난 암컷 범고래가 무리를 이끈 경우가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컷보다 32%, 성체 수컷보다는 57%나 많다.


이빨 고래 암컷도 폐경을 한다. 딸이나 손녀와의 짝짓기 경쟁을 피하면서 후손 세대의 생존을 돕기 위해 진화한 것임을 보여준다. 자녀 및 손자·손녀와 함께 살며 도울 수 있는 기간을 늘려준다. 이빨고래 다섯 종의 암컷은 비슷한 크기의 다른 종 암컷보다 더 오래 살고 같은 종 수컷보다 수명이 훨씬 길다. 범고래(이빨고래)의 경우 수컷은 보통 40살 정도에 죽지만 암컷 범고래는 80대까지 살 수 있다.


유인원도 폐경을 한다. 자연에서 사는 침팬지도 폐경을 한다는 것은 2023년 연구로 밝혀졌다. 침팬지도 인간과 같이 폐경 후 두 호르몬이 감소하고 나머지 두 가지가 급증한다. 침팬지의 폐경 이후 생존 기간이 평균 수명의 20%에 해당한다. 2000년대 초 미국 동물원에 사는 고릴라에서 폐경이 처음 확인됐지만, 야생 고릴라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2025년 아프리카 우간다의 브윈디(Bwindi) 국립공원에 사는 산악고릴라 집단에서 암컷의 3분의 1이 번식을 중단하고 최소 10년 이상 사는 것이 관찰되었다. 고릴라의 폐경을 확증하려면 침팬지처럼 호르몬 분석이 필요하다.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510998122


인간과 같은 고도로 사회화된 동물의 폐경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다. 다른 동물의 암컷은 생식기간이 끝나면 죽지만 인간은 가임기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사는 것은 손주와 자손에게 진화적 이익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자연선택의 가설이다. 직접 자녀를 낳기보다는 손자들의 양육에 도움을 줘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번성시키는 방향으로 여성의 몸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 있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결혼했고 일찌감치 손주를 봤다. 과거 인간의 수명은 50살도 되지 않아, 폐경이 오기 전에 죽은 사람도 있었고 폐경과 죽음이 동시에 왔다. 인간 할머니 가설은 현대에나 의미가 있다. 수명이 크게 증가하면서 손주를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노인 부모가 손주들을 돌보아 후손의 생존비율을 높여 유전자를 후세에 전할 가능성도 높아지게 한다. 할머니의 손주양육에의 참여는 학업 성취도 향상, 사회성 증가, 신체 건강 등 다양한 지표에서 긍정적 효과를 보인다는 연구는 많다. 할머니는 손주를 사랑하지만 지치고 힘들다. 양면적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노산(older pregnancy)은 자녀에게 문제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