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읽을까
종교에 관하여 뭔가를 쓰는 것은 그리 마음이 가지 않는다. 내 안의 마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읽지 않을 것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현대인은 특히 종교에 관심이 없다. 그래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우선 종교의 역사가 알아야 한다
우주가 탄생한 지 138억 년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 없었으니 종교도 없었다.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전에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신은 인간이 필요했을까? 우주가 탄생하고 거의 138억 년이 지나고, 수십만 년 전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났다. 우주의 긴 시간에 비하여 인간이 살아온 시간은 0.003% 밖에 되지 않는다. 기독교나 불교 같은 ‘고등’ 종교가 나타난 것은 만년도 되지 않았다. 우주적 시간에 비하여 0.00005% 밖에 되지 않는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4천년 경에 시작했으니 그 전에는 제대로 된 종교라고는 있을 수가 없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도 없었고 붓다의 가르침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유대교나 기독교도, 힌두교나 불교도 없었다. 당시 인간은 먹고 살기도 힘들고 언제 맹수에 잡혀먹을지 모르는 환경에서 살았으며 문자도 책도 없었다. 우주에 비하여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살았던 인간 중에 ‘고등’ 종교를 믿는 사람은 최근의 일로 전체 인간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적다. 어느 날 갑자기 ‘유일신’이 도래하고 ‘고등’ 종교가 나타났다. 수천 년 전에 나타난 ‘이들’ 종교가 그것을 믿는 인간에게 ‘절대 진리’가 되었다.
그럼 어떻게 고등 종교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났는지 궁금하다. 독일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983~1969)는 이렇게 ‘갑자기’ 주요 종교와 사상이 등장했던 시기를 ‘축의 시대’라고 불렀다. 기원전 900~200년에 이르는 시기이다.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 인도에서는 붓다,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와 이사야 같은 선지자,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가 이 때 등장했다. 당시 등장한 사상이나 종교는 도덕성을 강조했다. 이후 등장한 유교, 도교, 힌두교,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인류의 종교와 세계관으로 정착했다. 그럼 이 시기에 왜 어떤 이유로 갑자기 고등 종교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났을까?
인간은 오래 세월 먹을 것이 부족했고 맹수의 표적이 되었고 자연재해를 겪으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가뭄이나 흉년 같은 불운이나 이를 일으킨다고 생각되는 악령을 막기 위하여 제사를 지냈다. 비나 풍년을 기원하면서 신에게 희생 제물도 바쳤다. 그러다가 점차 먹을 것이 풍족해지고 풍요를 누리면서 생활양식도 달라졌다. 문자가 만들어지고, 학문이 시작되었으며,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죽음을 알기 시작하였다. 사람은 먹을 것이 풍요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실존적인 생각도 들고 사후세계 같은 미래도 생각하기 마련이다.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의 보상을 포기하고 내세의 보상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도덕적 종교가 등장했다. 축의 시대에 ‘도덕적’ 고등 종교가 나타난 것은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지던 시대였다. 실제로 하루 에너지 소비가 20,000 칼로리 미만인 사회에서는 도덕적 종교가 거의 출현하지 않았다. 반면 20,000칼로리를 넘어서는 곳에서는 도덕적 종교가 많이 나타났다. 도덕종교가 나타난 것은 경제적 풍요의 결과이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학자나 종교인이 아니라 과학자가 과학저널 게재한 논문에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종교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런데 종교학자들의 반론도「사이언스」라는 세계적인 과학저널에 실렸다. 종교가 과학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는 흥미로운 전개이다. 종교학자들은 축의 시대라는 수백 년의 짧은 기간에만 도덕적 종교가 나타났다는 데 의문을 제기했다. 고대 중국에 등장한 많은 도덕적 종교들은 그 이전에 이미 나타났다. 반면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서기 7세기까지도 도덕종교가 출현하지 않았다. 종교학자들은 특정 기간보다는 사회의 복잡성과 규모가 더 관련이 있다고 본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종교는 더 많은 사람들과 협력할 필요성을 자각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입장이다. 즉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간 사회가 확대되고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면서 ‘도덕’이 부상한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가 풍족해져서 도덕종교가 나타났다는 주장이나 사회적 필요에 의하여 도덕종교가 부상했다는 가설이나 같은 측면의 두 가지 모습일 수 있다. 인간 문명이 풍요로워지고 복잡해진 것이다. 여기서 과학자의 주장과 종교학자의 입장 중 누가 더 타당한 것인가 보다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고등 종교가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신앙인이나 종교인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도덕 종교가 출현하였지만 2천 년 이상이 지난 지금 종교는 인간 사회의 ‘도덕’에 공헌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도덕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종교보다는 과학과 이성이 훨씬 큰 역할을 하였다. 노예제도의 폐지에 종교는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이 노예제도의 폐지를 촉발하였다. ‘도덕적 진보의 원동력은 종교가 아닌 인본주의와 과학이다!’ 18~19세기 노예제에 대한 과학적 반론은 다른 소수자들을 위한 권리혁명으로도 이어졌다. 여성은 출산 도구나 재산으로만 취급받았지만, 과학과 이성의 발달에 힘입어 남성과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지닌 인격체로 존중받는 근거가 마련됐다. 유전자나 태아 시기 호르몬 발달 등에 의해 성적 지향이 결정된다는 과학적 지식이 확립되면서 동성애는 더 이상 정신질환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도덕은 동물에게까지 적용되는 추세이다. 종교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당연시해왔지만, ‘종’ 차별이라는 공고한 벽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종교선택은 기질과 환경에 좌우된다
진화론 등 과학의 발전은 종교의 가장 큰 도전이다. 종교계 특히 보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기독교가 반발하고 있지만 진화론은 이미 이론 이상의 것이 되었다. 찰스 다윈 이후 100년 이상 연구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진화론을 반박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단 한 번도 과학과 부딪혀서 ‘승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 왜 지동설에는 아무 말도 못하는지 묻고 싶다. 과거에는 과학이 자연현상을 연구하였지만 이젠 과학은 종교도 파헤치고 있다. 과학저널인「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 의하면 분석적인 사람은 종교를 잘 믿지 않는다. 종교가 발생한 역사적 배경, 종교적 주장을 분석적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은 종교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단순한’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도전적인 주장이다. 20세기와 21세기 들어서는 뇌 과학이 종교와 신앙을 뿌리부터 파헤치고 있다. 뇌 과학에 의하면 신을 믿는 것은 단지 두뇌 활동이며, 신이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한다. 예를 들어 우울증을 치료할 때 쓰는 자기장을 뇌에 쏘았더니 신이나 천국에 대한 믿음이 감소하였다. 신앙이라는 것이 단지 뇌의 만족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종교적 경험을 하면 감정 조절하는 뇌 부위의 활동이 커진다. 이 부위는 마약이나 도박, 성관계 등을 할 때 활성화하는 곳이다. 종교적 경험은 뇌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종교를 믿거나 신앙을 갖는 것은 환경의 영향도 받는다. 종교나 신앙이 절대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의미이다. 가난하거나 빈부 격차가 심하여 먹고 살기 힘들고 삶이 고통스럽고 위험한 지역일수록 종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 힘든 삶을 무언가에 의지하고픈 심리적이 요인이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북유럽 등 선진국일수록 종교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신앙인의 수가 아주 적다. 우리나라도 점차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비율은 감소하고 있다. 다만 빈부격차에 따른 종교인의 분포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2017년 자료를 보면 중상층 이상이 밀집한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등의 청년은 50% 이상이 종교를 믿었으나 금천구, 관악구, 은평구, 영등포구 등은 30%밖에 되지 않았다. 거꾸로 여유가 있어야 종교생활을 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신앙보다는 ‘문화생활’이나 일종의 ‘보험’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면도 있다.
종교는 배워야 한다
게다가 종교와 신앙은 사실 배우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학습이 없으면 해당 종교에 대한 믿음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의 믿음은 누군가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 ‘누군가’도 누군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것이 유일신 종교가 말하듯이 ‘계시’나 ‘은혜’일 수 있지만 문제는 세상에 종교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그 많은 종교가 모두 신에 의하여 계시된 것인지 인간이 만든 것인지를 구분하는 어떠한 기준도 없다. 그냥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전이나 가르침이 그 기준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물론 특정 종교를 믿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학습이 없으면 종교도 신앙도 없다.
문자가 없었던 구석기 시대에는 어떠한 종교도 신에 믿음도 해탈에 대한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등종교는 인간이 진화하여 머리가 좋아지고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나타난 종교는 ‘학습’되어 이어져 내려온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역사 내내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로 믿는 사람이 없었다가 배워서 그 종교에 대한 신앙이 생긴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은혜로 신앙이 온다고 하지만 너무 ‘자의적인’ 주장이다. 그럼 힌두교를 믿는 것, 이슬람교를 믿는 것은 신의 은총이 아닌가 말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만 신의 은총이라고 주장하는 자체가 모순적이다. 자신이 신인 것처럼 판단하는 것은 아닐지 반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앙과 종교에 대한 학습은 곧 ‘세뇌’와 유사하다. 신앙에 의한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2018년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목사가 성폭행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종교적인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교인들이 세뇌를 당해 목사를 신적인 존재로 보았다. 성폭행을 하면 “너를 선택한 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거다. 너랑 나랑 성관계를 하면 천사들도 고개를 돌린다. 천국에서도 이런 아름다운…항상 내 로망이었다.”라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지만 신도들은 믿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2011년 서울 목동 제자교회 정삼지 담임목사가 두 명의 집사들과 함께 공금 32억 여 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4년이 선고되었다. 이들은 교회 돈을 신도 명의의 계좌로 송금하는 방식으로 빼냈다. 2년 전인 2009년 예장 합동총회의 세미나에서 정삼지 목사가 강사로 나왔다. 처음 교회를 개척하다가 실패를 한 후 “너에게는 교회 개척이 중요하지만 나에겐 네 심령이 바로서는 것이 중요하단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말을 듣지 말라. 환경, 돈에 의지하려 하니 하나님께서 답답해하신다.”라고 했다. 교회의 신도들도 이런 목사가 하는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다.
대학에 들어와 스무 살에 ‘이단적인’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에 빠진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그런 이단에 빠졌다는 것이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10여 년이 지나서야 그 종파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어린 시절 ‘세뇌된’ 신앙인은 빠져 나오지 못한다. 일부 선진국에서는 미성년자에게 가정에서도 신앙과 종교얘기를 하는 것이 금지된다. 성인이 돼서 스스로 선택하게 하려는 취지이다. 종교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 자라난 부모의 영향을 90% 이상 받는다. 인도에서 태어난 사람은 거의 모두가 힌두교 신자이듯이. 미성년자에게 종교를 가르치는 것은 오류이고 심지어는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행위이다. 인간은 인식능력의 한계가 있으며 누구도 무엇이 진리인지 판별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도 토론과 질문이 필요하다
문제는 종교가 믿음, 순종, 계시 등을 핵심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성, 토론과 비판을 핵심으로 하는 철학이나 과학과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무조건 믿는 종교와 언제나 ‘의심’하는 과학은 대화를 할 수 없고 대화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종교가 완전히 비이성적, 무비판적, 폐쇄적인 것으로만 치닫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는 기본적으로 무조건 믿는 행위이다. 그래서 늘 오류에 노출된다. 또한 어떠한 오류가 발견되어도 개의치 않는다. 우리나라의 개신교계의 상당부분은 지나치게 비이성적이고 무모하다. 그래서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로 2021년 ‘코로나19와 한국교회에 대한 연구발표회’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비기독교인 85%가 코로나로 인해 개신교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다고 응답했다.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으로 인식되어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신뢰도를 묻는 질문에도 62.9%가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2013년에는 45%의 신뢰도를 보였으나 크게 악화되었다. 사실 종교별 신뢰도에서도 개신교가 꼴찌이다.
종교에서 질문과 토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종교인들은 ‘그냥’ 믿는다. 특히 모든 종교의 ‘신앙인’들은 자신의 종교 안에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사실 종교가 갖는 특성이다. 그러나 특정한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그 안에서 인간 삶의 본질적 문제를 ‘일거에 척결할’ 해답을 자동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신이 진리라면 우리는 그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종교지도자가 하는 말 또는 경전에 나오는 문구를 그냥 그대로 믿는다면 그것은 맹신이나 미신이다. 전광훈 목사가 목회를 하는 사랑제일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이다. 코로나가 대유행하던 때에 “오히려 이런 예배에 참여하면 성령에 불이 떨어지기 때문에 걸렸던 병도 낫는다고요. 이번에 바이러스 걸린 사람 있습니까. 아니 다음 주에 다 예배 오십시요. 주님이 다 고쳐주실 겁니다.”라는 설교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예배에 나온 사람 상당수가 코로나에 걸렸고 그 자신도 확진 자가 됐다. 광화문 집회에서 코로나에 감염된 이 교회 신도의 가족이 SNS에 “전광훈은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 기어이 집회를 열었다. 교회의 명령을 어길 수 없고 교회 말을 따르는 게 하나님을 따르는 일이라 생각한 이들은 집회로 몰려나갔다.”라는 말을 했다. 전염병이 퍼졌을 때 맹목적 믿음으로 모여 기도하다 집단 감염된 사례는 역사적으로 많았다. 엉뚱한 것을 믿는 것은 아닌지, 자기 종교의 진실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의 인식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설령 진리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가 없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한계가 있다는 점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종교는 고된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종교적 통찰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미술이나 음악, 시를 보는 눈이 길러지듯이 길러지는 것이다. 종교도 예술과 마찬가지로 진실을 찾으려면 우리의 의식을 특별한 방식으로 연마해야 한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예로 들어보자. 유목 생활을 하던 유대인의 종교는 기독교의 태동과 함께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로마제국은 붕괴되었지만 그 신앙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유대교가 기독교로, 유럽인의 종교에서 미국인의 종교로, 그리고 다시 한국인의 종교가 되었다. 오랜 세월 복잡한 역사를 거쳐 들어온 한국 기독교에게 근원적인 질문이 남는다. 그것은 유대교의 신 야훼는 누구인가, 그리고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답은 수많은 논쟁을 겪었다. 그것의 역사와 배경은 정말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그것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질문 없이 ‘답’만을 외우고 있다. 특히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40년간 미국에서의 개신교 근본주의는 교황 무오류설과 낙태, 동성애, 혼전 성관계, 피임 금지를 내세우는 보수 가톨릭들과도 긴밀한 동맹을 맺고 있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자발적’ 무지에 기초를 한다. 자발적 무지란 자신의 종교와 신앙에 대하여 일체의 질문도 의문도 품지 않으며 과학에도 완전히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선진국 가운데 진화론을 확립된 주류 과학이 아니라 여전히 ‘논쟁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미국 그리고 한국뿐이다. 반 지성주의는 무지를 먹고 자란다. 목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맹신하고,『성경』엔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학문의 기본은 의문 제기이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그 답이다.
종교는 불완전하지만 영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는 고대의 신화이자 허구이며, 비과학적인 착각이자 무지의 소산일까? 종교는 모순적이기도 하고 역설적인 면도 많다. 오랜 세월을 이어왔다고 하여 오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천년 이상 믿었던 천동설도 하루아침에 무너졌듯이 종교도 그 자체에 오류가 없을 수는 없다. 예루살렘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열쇠 지기는 출입구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역설적인 것은 성묘교회의 열쇠를 관리하는 사람은 이슬람 신자이다. 십자군은 1098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거주민 수만 명을 살해했다. 반면 살라딘은 재점령한 후 성안의 십자군과 가톨릭 신자들을 죽이지 않고 평화적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이 열쇠는 1187년 예루살렘을 십자군으로부터 재탈환한 살라딘(Al-Nasir Salah al-Din)이 직접 건넸다고 한다. 모순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그렇게 간단하게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여전히 진지한 신앙인이 존재하며 많은 사람이 종교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 있다. 무신론자나 종교 비판가가 말하듯이 종교는 인간의 삶에 아무렇게나 보태진 것, 몰염치한 사제들이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고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종교란 과거의 유물이며 고대와 중세의 세계관일 뿐이라고 일갈할 수만은 없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인간을 따라다니는 ‘실체’이다. 그렇다. ‘신’ 같은 초월적인 존재나 ‘진리’에 대한 욕구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욕구’이며 특징이다.
종교와 신앙이 인간의 죽음과 실존적인 고민을 다루는 유일한 분야는 아니다. 예술도 종교와 같이 죽음과 실존의 문제를 다룬다. 19세기 스위스의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 1827~1901)은 죽음을 예술로 그린 화가이다. 자화상으로 그린 그림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해골 모습이 배경에 나타나 인간의 죽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질병으로 12명 중 여섯 명의 자녀와 부인을 잃은 비극을 겪었다. 죽음이 늘 가까운 삶을 살았고, 그의 그림에도 죽음에 대한 고뇌가 나타난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인간이란 무엇인지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찾는 노력이다. 기독교 같은 유일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 또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인간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엄연한 현실과 불완전한 현재의 삶 ‘너머’의 삶을 기대하면서 나타났다. 예술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허무, 그리고 삶의 현실에 맞서 의미를 찾는 시도이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라 절망에도 쉽게 빠진다. 하지만 좌절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삶의 가치를 찾아 종교를 ‘만들고’ 또는 신과 종교를 찾고 예술을 창작해왔다. 종교는 삶에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 위안을 찾는 비명이요 ‘억압 받는 피조물의 신음’이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가리켜 ‘우리 고난의 외침’이요 ‘영혼의 비탄’이며, ‘인간비참을 두고 저 깊숙이 숨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라고 해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