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문사회

농업과 우유의 역사와 ‘루저’라는 혐오발언


2009년 11월 방송에 출연한 한 여대생은 “180㎝ 이하의 남자는 루저(loser)”라고 말했다가 커다란 후폭풍이 일어났다. 해당 방송사와 여대생이 관련된 웹사이트가 초토화되었다. 이 사건은 ‘루저’라는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세태에 이건 하나의 ‘저질적인’ 촌극이다. 사실 차별에 반발하고 흥분하면서도 희망하는 이성 친구는 ‘키는 ~이상’이라고 별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이 많다. 루저라는 말은 극단적인 발언이지만 그 밑바닥을 보면 도도히 흐르는 강이다.


인간의 키는 진화와 역사의 산물이다. 특히 농업과 유목과 관련이 있다. 기원전 4000년과 기원전 1700년 사이에 두 군데의 ‘중심’에서 일기 시작한 파문이 전 세계의 인간사회로 확산되었다. 유럽·아시아·아프리카의 다양한 풍토 속에서 서아시아식의 화전농법은 적당한 온도·강우량·자연림의 조건을 갖춘 새로운 지역으로 계속 퍼져 나갔다. 좀 더 시간이 흐르자 문명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고도의 복합적인 사회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기원전 3500년과 기원전 2500년 사이에 유목민사회와 쟁기를 사용하는 농경사회가 출현함에 따라 인간의 생활양식이 눈에 띄게 다양해졌고, 기온과 강수량이 적합하여 대규모로 곡물을 재배할 수 있었던 유라시아대륙과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문명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신석기 경제는 더 많은 식량을 생산했고, 따라서 구석기 시대의 떠돌이 경제보다 더 많은 사람과 더 높은 인구밀도를 지탱할 수 있었다. 인구가 급속하게 팽창함에 따라 정착된 공동체가 설립되었고 영구적인 주거가 세워졌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 이후 인간은 정착생활을 하면서 대부분 자기 땅을 떠나지 않고 살아왔다. 농지 근처에 집을 짓고, 아주 짧은 거리를 걸어 다니거나 약간 먼 거리는 마차를 이용해 오갔다.


유럽인 남자는 보통 1m 80cm대이다. 하지만 아시아 사람들은 170cm 정도이다. 특히 북유럽사람들은 정말 키가 크다. 물론 작은 사람들도 많다. 이런 차이가 우유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살면서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만성적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키와 몸집이 작아졌다는 것이 그동안의 정설이다.


2만6000년~2만 년 전 마지막 최대 빙하기에 추위와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해지면서부터 키가 작아지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평균 키는 기원전 2만 8천 년 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기원전 6000년~기원전 4000년경에 저점을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서아시아에서 전파돼 온 작물이 중북부 유럽의 서늘한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중부 유럽에서는 기원전 5000년~기원전 2000년, 북부유럽에서는 기원전 6000년~기원전후에 우유를 먹기 시작하면서 키와 몸무게가 커지기 시작했다. 우유를 먹으면서 유당을 소화시킬 수 있는 유전자변이가 자연선택 되었다. 키가 커지는 시기와 지역이 유전자변이가 나타난 시기가 일치한다. 동부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이 우유를 주식으로 하는데 유난히 키가 크다. 비록 락타아제가 유럽인의 키를 키웠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설득력은 있다. 특히 발트 해 연안과 스칸디나비아반도 남부 지역 사람들은 크다. 지중해 동부나 중국처럼 목축과 농업이 오랜 기간 공존한 지역은 키가 작다. 크고 싶으면 우유를 마시라는 말을 어린 시절 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유전자에 진화 이야기가 심어져있는 것 같다.

Long-term trends in human body size track regional variation in subsistence transitions and growth acceleration linked to dairying | PNAS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간의 비극: 한쪽에서는 굶주리고 한쪽에서는 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