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몸의 균형이 무너지며 한쪽 어깨가 기울었다. 그리고 걸을 때면 기울어진 쪽 발을 땅에 끌었다. 당연히 끄는 쪽 신발이 먼저 해지곤 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늙어 갈수록 할머니를 똑 닮아서 걸을 때면 왼쪽 발을 땅에 끈다고 잔소리를 했다.
“피는 못 속인다더만 누가 그 엄마 아들 아니랄까 봐 아주 걷는 것도 똑같다니께~ 당신 엄마가 기울어진 쪽으로 발을 질질 끌어서 그쪽 고무신 밑창이 먼저 떨어져 나가는 거 봤잖아유~ 당신이 지금 그렇게 걷구 있는 거 몰러유~? 신경을 똑 바루 쓰구 걸으믄 걸음걸이가 왜 그렇게 되것어~ 여기 신발 좀 봐유~ 당신 왼쪽 신발이 오른쪽보다 삐뚜룸하니 더 닳었잖어유~ 한두 살 먹은 애두 아니구 말이여~"
엄마는 말이 많고 집요했다. '신경을 쓰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잘 못할 것이 없다'라는 주장이었다. 신경질과 잔소리는 엄마가 살아가는 에너지여서 매일 누군가를 대상으로 충전을 해야 하는 것처럼 쉬는 날이 없었다. 잘잘못에 대한 해석 또한 엄마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졌다.
엄마는 밥을 먹을 때면 식탁에서 멀리 앉는다. 그리고 팔을 길게 뻗어 밥을 먹는다. 예전에 바닥에 밥상을 펴고 먹을 때도 그랬다. 그때는 몰랐다. 아마도 젊고 아무 일 없었으니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늙고 아프기까지 하니 밥을 먹을 때마다 밥이나 반찬을 옷이나 바닥에 흘린다. 의자를 바짝 끌어다 놓고 식탁과 가까이 앉으라고 해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눈도 흐릿해져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보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언제나 완벽한 자신이 밥이나 반찬을 흘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이다.
처음에는 엄마의 자존심이 상할까 싶어 눈치 보며 몰래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닦아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고 흘리는 정도가 심해질수록 내 참을성은 바닥을 보였다. 식탁에 바짝 다가앉던가 허리를 숙여서라도 밥그릇과 가까이하고 먹으라고 짜증을 냈다.
"그렇게 안 되는 걸 어떡한다니~ 타구 나길 그렇게 타구 난 걸~ 뱃속에서부터 타구 난 건 못 고치는 거다."
엄마의 대답은 젊어서부터 언제나 한결같다. 완벽한 자신이 잘못하는 것은 항상 타고난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다. 엄마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식구들 중 어느 누구도 '왜 엄마 잘못은 다 타고난 것이냐'라고말하지 못했다.
지금도 엄마는, 살다 보니 늙고 아프지만 그런 것치고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으냐고 말한다. 무엇이 어떻게 훌륭한지는 모르겠지만 넘치는 자기애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내가 가지지못한 자신감이 엄마에겐 쓸데없이 넘치는 것도 내가 엄마를 미워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