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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자의 조각보 Feb 13. 2022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누구나 한 번은 다 죽는 거야!



 가난과 차별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편과의 사별로 아내 역할을 졸업하고, 두 아들의 결혼으로 엄마 노릇도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쉰여섯에 들어간 대학도 졸업했다. 이렇게 다양한 몇 번의 졸업을 하고 나니, 누군가의 표현처럼 이제 ‘첫 털갈이를 시작하는 시골의 꺼벙한 누렁이처럼’ 어설프게 늙은 여자로 나 혼자 오롯이 남았다.  

    

  이제 비로소 어릴 적, 엄마의 구박을 피해 작은 길고양이처럼 골목을 헤매며 보내던, 축적된 입체지도처럼 작지만 또렷한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지금껏 자세히 보아야만 보이는, 오래되어 희미해진 흉터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미처 빼지 못하고 남아있는 작은 가시처럼 따끔하게 찌르는 적 있어도 모르는 척 외면했다. 이제 다 지나갔어, 별거 아니야, 그때가 언제 적이라고,, 이러면서..  

   




  나는, 어려운 형편 때문이라는 핑계로 항상 화가 나 있는 엄마의 신경질과 폭언을 들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내가 나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엄마는 입버릇처럼 했다. 내가 죽어버리면 없는 살림이지만 빚을 내서라도 잔치하면서 춤을 출거라고 했다.  

   

‘큰 차가 오거든 눈 딱 감고 뛰어들라’고 했다. 누구나 한 번은 다 죽는 거라면서.   




  

  내가 도망치듯 결혼하자 엄마는 독한 말을 퍼부을 대상을 아버지로 바꾸어 이어나갔다. 마치 그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에너지라도 되는 것처럼 멈추지 않았다. 평생 늙지도, 병들지도 않을 것을 보장받은 사람처럼 말하던 엄마는 이제 늙고 병들어 나에게 기대 있다. 그러면서 내게 했던 차별과 학대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증스럽다.  

   

  우리는 똑같이 불행하고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토닥이고 위로하며 더 늙은 여자인 엄마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제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자꾸 애만 쓰는 것은 엄마를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은 까닭이라는 것을. 이해는 하는 거지만 용서는 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난 용서가 되지 않는다. 흉터만 남은 줄 알았지만 아직도 곪아 덧나고 있는 내 어릴 적 상처와 불행을 이제 쓰레기처럼 버려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인생의 가장 반짝이는 십 대를 두 평도 안 되는 작은 골방에서 외톨이로 보냈다. 토씨 하나까지도 잊히지 않고 기억나는 엄마의 악담과 함께였다. 그리고 너무 늦게, 나의 어린 시절이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로 느끼는 절망과 분노와 후회로 우울한 시간을 오래 가졌다.  

    

  지금도 여전히 부모가 어린 자식을 학대하는 잔인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가스 라이팅’이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낯설지 않은 요즘이다. 물리적인 폭력보다 보이지 않는 감정적인 상처가 더 크고, 더 깊고, 더 아프다. 한마디 말이 주는 상처의 크기와 지속성을 생각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한마디 말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졌는지 말해준다. 독한 말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내 기분에 따라 감정적으로 쉽게 뱉은 한마디 말은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세월은 생각보다 빠르고 나쁜 기억일수록 또렷하게 오래간다. 이런 흔하고 평범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번 더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아직도 통증이 느껴지는 묵은 내 이야기들을 용기 내어 서랍 속에서 꺼내려한다.   

  

  비슷한 시간을 경험하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의 솔직하고 담담한 이야기가 공감과 위로와 반성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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