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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자의 서랍 Jan 25. 2023

설익은 시간의 기억들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는 기억하나쯤 있다. 사람에 따라 행복한 기억일 수도, 불행한 기억일 수도 있다. 내겐 불행했던 시간의 기억만 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 무렵까지 혼자 보냈던 시간들이다. 온 가족의 미움을 받으며 나의 생존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았었다. 그 기억은 마치 떠도는 유령처럼 지금도 아무 때나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



나쁜 기억의 영향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항상 주눅 들게 한다. 그런 내 모습에 화가 날 때마다 이솝우화 속 여우의 신 포도처럼 '나는 어릴 적 엄마에게 정서적 학대를 받았으니 당연한 거야'라고 비겁한 핑계를 대면서 인정받지 못하는 합리화도 자주 한다. 감추고 있을 때는 단점인 것도 솔직하게 드러내면 더 이상 단점이 아닌 것이 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 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가족의 치부를 드러내 것 쉽지 않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곳에서의 글쓰기는 여러모로 내게 유의미하다. 솔직하면서도 은밀한 이 브런치 글쓰기 공간은 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는 유일한 대나무 숲과 같은 곳이다.






엄마는 지금도 나의 풀어버리지 못하는 족쇄다. 받을 때까지 걸어대는 전화,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긴 시간의 통화, 다른 사람을 포함한 자식들 흉보기와 아직도 이어지는 신세타령을 들으며 매일 귀에서 피를 흘린다. 엄마와 하는 통화는 마치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안내말과 같다. 내 반응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말만 일방적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내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나와 함께 공유하려 한다. 미칠 것만 같다. 나를 그토록 미워하던 그때를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지만 착하게 오랫동안 길들여진 나는 '엄마 목소리도 듣기 싫으니까 내게 제발 전화하지 마!'라는 말이 모질고 잔인한 것 같아 하지 못한다.






내 방은 작았다. 지붕 처마의 기울어진 부분에 벽돌을 쌓고 벽지를 발라 만든 방이었다. 그래서 천장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낮은 쪽은 내가 일어서면 머리가 닿았다. 분홍색 무늬가 있는 벽지를 천장과 벽의 경계 없이 발라놓았다. 분홍색 방의 천장에는 쥐의 오줌인지 비가 샌 것인지 작은 얼룩들도 몇 군데 있었다. 매달린 형광등의 갓과, 이어진 흰색의 전선줄에는 파리의 배설물이 까만 점처럼 묻어 있었고, 그 방에 가구라고는 거울 하나와 지퍼로 여닫을 수 있는 철제 뼈대를 비닐로 감싼 옷장뿐이었다. 방에는 작은 미닫이 문이 있었고 그 문은 또 하나의 방으로 이어졌다. 그곳은 창고처럼 쓰였다. 구들을 놓지 않은 방이라 겨울이면 추웠고 문밖에는 연탄을 기대어 쌓아 놓아 문을 열지 못했다. 내방의 작은 미닫이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는 방이었다.



가을이면 메주를 만들어 그 방에 두었다. 김장이 끝나고 겨우내 먹을 대파를 심어놓은 한쪽 모서리가 깨진 커다란 옹기 화분도 그 방에 있었다. 종이를 발랐을 뿐인 미닫이 문을 열면 그 방에서 황소 같은 찬바람이 들어왔다. 내 방에 깔린 노란색 싸구려 장판은 연탄아궁이에 가까운 쪽은 갈색으로 타서 변해있었다. 어쩌다 사 오는 이백 원짜리 삼중당문고 책을 읽고 또 읽며 나는 그 방에서 하릴없이 뒹굴었다.





공장에라도 다녔어야 했다. 하지만 국민학교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나는 취직이라는 것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남들보다 많이 못난 나는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국민학교는 제대로 나왔어야 작은 공장에라도 소개해 줄 수 있다고 동네 아주머니는 말했고, 그 소리를 들은 엄마는 내가 써먹을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다며 불만스러워했다. 그때 공장에라도 다녀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더라면 지금까지 사람과의 관계를 두려워하는 일은 겪지 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환경에서도 내가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엄마로부터 매일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미우면 차라리 '고아원'으로 보내지'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있는 집보다 고아원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끼니도 거르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가 죽으라는 데두 먹구 살것다구 꾸역꾸역 밥은 잘두 처먹는다'라는 엄마의 말이 듣기 싫어서였다. 때로는 '경자 너는 자존심두 읍냐? 나 같으믄 혀를 깨물구라두 죽었을 텐디~'라는 말도 들었다. 아! 나는 그때 정말 죽었어야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떡볶이나 튀김을 파는 분식집을 가본 적도, 원을 다닌 적도, 한참 유행하던 롤러스케이트장도 가본 적 없다. 돈도 없었지만 함께 할 친구가 없었다. 오빠나 동생도 나와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과 놀았다. 나는 미운 오리 새끼처럼 항상 혼자였다. 내가 애썼던 것은, 나는 모르지만 알고 싶다는 것, 너희들이 럽다는 것,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그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감추는 것이었다. 불쌍하게 친구가 전혀 없었던 나는 당연히 또래의 정서나 문화를 경험할 수 없었다. 그때 친구들의 관심사는 무엇이었는지 대화의 주제는 어떤 것이었는지 친구들과는 어떤 놀이로 시간을 보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사는 내내 남들과 어울리며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곤 했다.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게 하루를 보낸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서툴고 불편한 사람과의 관계를 내가 선택해서 이어가지 않는 것이다. 



가끔 쓸데없지만 이런 생각도 한다. 어린 시절이 보통의 아이들처럼 평범했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내가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그때 그랬더라면..'이라는 것은 없는 걸까? 그때 들었던 노래가, 그때 읽은 책 내용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것을 보면 나는 그때 더 많은 것들을 했어야 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책을 읽고 많은 노래를 듣고 많은 친구들과 어울렸어야 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듯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나는 가장 빛나던 때를 놓쳐 버렸다. 이제는 분식보다 귀하고 비싼 것도 먹을 수 있겠지만  또래 친구들 수다와 함께 먹던 떡볶이, 튀김 맛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을 반성도 하고 늙고 병든 엄마가 가끔은 측은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깊고 오래된 미운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좀더 자존감 높고 만족한 삶을 살 수도 있었던 내가 엄마 때문에  생 팔자 바뀐 것은 아닐까 하는 원망스러운 생각을 문득문득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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