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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자의 조각보 May 22. 2023

내가 버려야 하는 것 3

이십오 년의 기록





나는 일기를 오랫동안 적어 왔다. 어림잡아 이십오 년은 넘은 것 같다. 그렇게 써 온 일기장이 책장 한편에 빼곡하다. 이제는 강박처럼 하루 일과를 메모형식처럼 적어서라도 남기지 않으면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하다.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아서 기록이나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 시간은 휘발되어 사라진다. 그런 자잘한 이유로 별 의미 없이 지내는 일상이지만 몇 자라도 적게 된다.


얼마 전 유행처럼 미니멀하게 살아보려고 살림살이를 줄이려는 시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중에는 오래전에 읽고 먼지만 쌓인 책도 버릴 것 목록에 있었다. 책장을 살피던 나는 책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기장에 눈이 갔다.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 보는데 책보다도 이것을 먼저 버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곳에는 엄마와 똑 닮은 내가 있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의 귀가 시간과 쪼들리는 생활비와 그로 인해 받은 상처의 감정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이런 일상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다고, 이제는 한계인 것 같다고 적힌 글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런 일들을 왜 적었던 것일까? 나에 대한 위로나 신세한탄이었을까? 아니면  힘들게 살았음을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서일까? 그런 일상이 중요했던 것일까?






16세기 조선 중기에 문인 이문건(李文健)이 16년간 손자 이수봉을 양육한 경험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자료로 양아록(養兒錄)이 있다. 현재까지 학계에 보고된 자료 중에서 자손교육 체험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현존 최고의 육아일기로 조선중기 양반집안에서의 아동교육과 생활풍속등을 이해할 수 있어 생활사, 미시사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한다.


또한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하는 tv프로그램에 언젠가 나왔던 81세의 기록 끝판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인분도 계셨다. 이분은 무려 30여 년 동안 달력에 사소한 하루 일과부터  날씨, 그동안 여행경비와 보험료, 가족 건강체크 일지까지 모두 적어 보관 중이었다. 신의 메모덕에 '부동산 사기를 당할 뻔한 친구가 무죄를 선고받은 일'도 있었고, 그것이 기록을 해 오는 동안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는 말도 했다.

 

 



이외에도 '조선왕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처럼 기록이라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느새 정보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우리 역사도 기록이라는 수단을 통해 현재에 알려지는 것이다. 역사적 다양한 기록물은 현대 문화콘텐츠로서 자원역할도 한다.






세월이 지나 읽어 본 예전의 내 일기는 우리 엄마가 했던 징글징글한 '신세타령'의 딸버전에 지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난다 해도 역사적 가치는커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종이뭉치에 불과할 뿐이다. 엄마는 말로 했고, 나는 일기의 형식을 빌어 글로서 '신세타령'을 했다는 차이뿐이다. 남편이 가끔 '당신은 엄마를 많이 닮았어!'라고 하는 말을 누구보다 듣기 싫어했다. 


하지만 무의식 중에 학습이라도 된 것일까?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니 누구보다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다를 리가 없다. 애초에 다르기를 기대하면 안 되는 거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다 늙어 돌이켜보니 '그 엄마에 그 딸'이 되어있다. 


내 딴에는 너무 힘들어서 먼 훗날에 누구라도 이렇게 살았던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런 글을 썼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읽어보니 세상물정 모르고 철딱서니 없는 이의 아이 같은 '투정'에 불과하다. 이제는 나 없을 때 아이들이 읽게 될까 겁난다. 많이 부끄럽다. 


 




지난 시간을 온통 부정하는 것 같아서, 다 없애지는 않고 최근 것만 몇 권 남길까 생각 중이다. 지금은  담백한 사실위주의 일기를 쓴다. 감정도 나이를 먹어서 퍽 건조해진 까닭이다. 그렇다고 일기 쓰기를 그만 둘 생각은 없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이라도 내 흔적을 전부 지워야 하는 날이 올 때까지 밥 먹고 잠자는 일처럼 일기 쓰기는 계속할 생각이다.


다만, 버려지는 일기와 함께 내 감정에만 충실했던 부끄러웠던 지난날들은 잊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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