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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vbe 글롭 Jun 10. 2022

돌로 빚은 승강장에서

이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를 가는 걸까 - Firenze, Italia

   왁자지껄. 그리고 기계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역의 안내 음성. 다들 무언가를 바쁘게 확인하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엄청난 인파가 자신의 행선지에 따라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낸다. 혼돈 속의 질서가 어떤 모습인지 누구라도 깨달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 자체가 막 붐비진 않았지만,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의 미묘한 압도감은 감각을 증폭시킨다.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핸드폰이나 보고 있을 서울역 대합실에서 그들도 같은 감정을 느낄지 모른다.


   다들 어디를 가려고 그렇게 열심인 걸까? 나는 여행자라는 신분을 스스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만, 시선을 외부로 조금만 돌려도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현지인인지, 어디를 가는지, 일을 하러 가는지, 가족을 만나러 가는지, 본인의 나라로 돌아가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 하나는 우리는 모두 오늘 가야 할 곳이 있고, 웬만해선 예약한 열차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벌어지니까 말이다.


Passengers - Santa Maria Novella, 2015 ©

   그렇게 약간의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아마 피사로 가는 길이었다. 기울어진 사탑의 피사. 사실 피사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혀 없었지만 설레는 마음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여행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어떤 배경이나 사실에 대해서 샅샅이 파헤칠 필요는 전혀 없다. '그' 건물이 있는 '그' 도시에 가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 너머에 완벽한 논리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나와 함께 기차를 기다리던 그 사람들. 각자의 인생에서 17분 남짓한 시간 동안 스쳐갔던 우리. 우리 모두 인생의 면면을 샅샅이 알고 있지는 않다. 어쩌면 그것이 자연스러울 것일지 모른다. 2번 승강장에서 밀라노에 가족을 보러 가던 그 승객이 가족의 모든 신상 정보와 앞으로의 계획을 줄줄이 꿰고 있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호러 영화가 따로 없을 것이다. 무지는 어쩌면 신의 선물이다.


   그렇다. 나는 그들 중 어느 누구의 이름도, 행선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문제 될 것은 어느 하나도 없다. 서로 어느 여름날 배경의 이름 없는 단역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우리는 여행지와 그곳의 건물 및 유적지,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낯선 이의 정보를 알지 않기에, 또 알아야 할 의무가 없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기차를 기다릴 수 있다.


Platforms  - Santa Maria Novella, 2015 ©

   그렇다면 여행에서 돌아온 후의 일상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우리는 어쩌면 연예인의 사생활에 지독할 정도로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옆집 강아지가 어떤 미용실에서 얼마짜리 관리를 받았는지 몰라도 괜찮다는 말이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시는 안 본다더라 따위의 정보는 불필요한 짐일지 모른다. 그저 나의 신분과, 행선지와, 두근거리는 마음이면 어떨까.


   물론 소중한 티켓과 그 시간의 마법이 적힌 사각 종이에 펀치 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되겠다. 불필요한 불편을 겪고 싶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이니까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겉모습은 달라도, 국적은 달라도, 혹은 궁금해하지 않아도, 그렇다는 것을 안다. 곧 찾아오는 여름, 몇몇은 다시 그 자리에 서서 설레는 바퀴 소리를 기다릴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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