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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vbe 글롭 Jun 11. 2022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까르보나라

치즈와 계란, 그리고 관찰레와 후추 - Pisa, Italia

   피렌체에서 피사로 오는 길은 그리 길지 않지만, 옆동네에 마실 나오는 느낌은 또 전혀 아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도착한 사탑의 피사. 소도시의 평안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왠지 모르게 장소 자체가 뿜어내는 오디오의 볼륨이 작은, 그런 평화로운 도시였다. 도시 간 여행이 주는 약간의 피로감과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은 그 고요 속 내 배꼽시계를 울렸다.


   여행지에서 배가 고프다는 것은 역시 설레는 일이다. 인류 역사- 미식의 역사는 매우 짧지만 -의 확실한 즐길 거리가 지금 이 순간 내게도 찾아왔다는 것이니까. 또 낯선 곳에서의 식사는 어떤가. 개인적으로도 가리는 음식이 없을뿐더러,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훌륭한 요리 문화와 풍부한 식재료, 그러니까 맛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한 도시였다. 이름난 건물보다는 확실하고도 거대한 행복을 먼저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하얀 건축물은 나의 작고 소중한 점심 식사 동안 도망가거나 쓰러지기 쉽지 않을 테니까.


A Cozy Restaurant - Pisa, 2015 ©

   그렇게 찾은 한 레스토랑. 사실 어떻게 찾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굶주려 배회하는 여행자를 한 따뜻한 식당이 발견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 품에 안겼다. 자세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주류가 진열된 것으로 보아 레스토랑과 바를 겸하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카페도 겸하는 그런 다재다능한 사업장인 것 같다. 한적하고도 뭔가 친숙한 분위기에 주문하지도 않은 점심 식사가 소화가 잘 될 것 같이 느껴졌다.


   처음 방문한 식당에서 받아  메뉴. 가지런히 정돈된 이탈리아어와 영어 사이에서 단연 나의 눈을 사로잡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바로 까르보나라. 꽤나 어릴 적부터 파스타가 입맛 맞았던 나에게 꾸덕한 크림 파스타는 언제나 리스트 최상단의 메뉴였다. 한국의 많은 식당은  파스타를 까르보나라라는 이름으로 팔아왔는데, 그러다 보니 고등학생 시절 유튜브 영상에서  '진짜' 모습은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한국의 모든 파스타 가게는 나를 속이고 있었다.


   하지만 화면을 핥을 수도 없고, 그런 시도를 한들 파스타의 맛이 느껴질리는 만무했다. 그렇게 '진짜' 까르보나라에 대한 열망을 남몰래 키워왔던 나는 드디어 진실의 순간을 마주한 것이다. 서빙된 빵의 담백하지만 무심한 듯 매력적인 맛을 느끼며, 그 녀석과의 조우를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Carbonara - Pisa, 2015 ©

   그렇게 나온 한 접시. 식당의 아늑함만큼이나 그 담음새도 자연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런 건 오히려 입맛을 돋우는 스토리가 되어준다. 정말로 면 위에 잔뜩 뿌려진 후추가 석탄을 닮아서, 혹은 석탄을 캐던 광부들을 위한 든든한 음식이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떠올리며 흑후추도 멋스럽게 뿌려본다. 노란빛의 소스 위 검은 점들이 사랑스럽다. 고소하고 녹진한 치즈와 관찰레 향기가 그렇듯이.


   맛은 어땠을까. 나의 편파적인 입맛을 감안하더라도 정말 감동스러웠다. 맛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단순한 미각과 후각의 조합뿐만이 아니라 담음새를 보는 시각과, 음식이 내는 소리를 듣는 청각, 식기와 상호작용할 때 느껴지는 촉각, 그리고 내가 가진 기억과 선호까지 총동원되는 감각의 집합체이다.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즐거움을 풍족히 즐기는 여유로운 식사 시간.


   그 이후로 종종 나는 집에서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먹는다. 관찰레와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를 구하는 것이 베이컨과 파마산처럼 간편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추구할만한 가치와 그에 걸맞은 충분한 용의가 있다. 여행, 혹은 인생의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학은 바로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추구할 만한 가치, 혹은 더 크게 본다면 지켜낼 만한 신념을 습득해 나가는 여정. 한결 더 가벼운 시선으로 본다면 찾고 나눌 확실한 기쁨의 종류가 늘어난다는 것. 오늘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까르보나라를 대접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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