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제가 사탑입니다만 주변도 좀 보시죠 - Pisa, Italia
우리가 드라마를 볼 때,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어떤 배우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첫 화를 보게 되고야 마는. 영화나 드라마나 인기 배우를 캐스팅하고 시사회에 앞세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아우라와 카리스마에 중력처럼 이끌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겪었듯 배우 손석구 님의 연기와 마스크를 담은 장면에 끌어당겨져 여러 작품에 눈이 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최근의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사탑은 그렇게 수많은 여행자를 피사로 이끌었다. 14세기에 완공된 이 종루가 언제부터 삐딱한 태도로 유명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정신을 차려보니 그 자리에 있었다. 허공에 손과 팔을 뻗은 채로 탑을 떠받치는 '그' 자세를 렌즈 앞에서 취하며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팔을 뻗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 그 광경은 약간 기괴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스럽다. 인스타그램과 달리 3D로 현장에서 보는 자세는 오묘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두가 신난 축제 같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는 다음 촬영을 위해 기쁘게 자리를 내어준다. 정중하게 고개 숙인 사탑이 호스트가 되어 세계인들을 초대한 축제. 역시 사람 보는 것이 그렇듯 관점에 따라 삐딱하기도, 정중하기도 하다.
한편 그 호스트의 한국식 이름인 피사의 '사탑'은 한자 그 자체로 기울어진 탑이라는 의미인데, 종종 사용되는 피사의 '기울어진 사탑'이라는 표현은 나의 탐구심을 항상 자극해왔다. '메밀 소바', '라구 소스', '살사 소스', '라인선'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두 번 기운만큼 많이 기울어졌으니 볼 만하다는 뜻이겠지. 실제로 보니 기대보다 더 기울어서 약간은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였다.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피사의 센터였다.
그런데 보면, 분명 주인공의 명성과 매력에 이끌려 보기 시작한 드라마에서 조연을 맡은 배우가 눈에 자꾸 밟힌다. 말 그대로 장면을 훔쳐버리는 경우도 있는 반면 은은한 매력으로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피사도 그랬다. 포동포동 아기 천사들이 뛰노는 푸티 분수, 수많은 조각상이 지키는 산 죠반니 세례당, 그리고 펼쳐진 녹색 광장의 자태.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잘 짜인 각본처럼 그들이 어우러지는 모습과 함께 각각의 개체가 가진 디테일이 마음을 빼앗았다. 이것이 전시회가 아니라면 무엇을 전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게 한바탕 둘러본 광장. 아름다운 구석이 너무 많았다. 또 드는 생각이, 정녕 저 사탑이 없었다면 내가 이 아름다운 장소에 들를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도, 저 조각상과 분수와 성당과 세례당은 지역의 유명인사인 종탑에 빚을 진지도 모른다. 한껏 기울어진 모양새로 이런 좋은 인연을 만들어주었으니. 그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었지만 이탈리아, 혹은 유럽에서 똑같이 성당, 종탑, 분수, 그리고 세례당으로 구성된 광장을 만나도 닮은 인상을 받기는 어려웠다. 감사하게도 고유한 피사의 아름다움을 경험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푸른 하늘과 하얀 돌로 이루어진 파티는 나의 여행관, 혹은 인생관에 영향을 미쳤다. 유명한 명소를 보는 것도 여행에서 중요하지만 그 주변에도 보석이 잔뜩 있다는 것. 어찌 보면 인생에서 또한, 주요한 과업 혹은 메인이벤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소중한 사건들이 나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러한 생각이 하나의 여행지에서 뿅 하고 떠올랐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반나절이 채 안 되는 경험은, 그 시간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떠나는 피사, 아기천사들은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