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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vbe 글롭 Jun 15. 2022

인생이라는 철로 앞에서

무섭고도 신비로운 철마를 바라보며 - La Spezia, Italia

   "엄마 나도 뽑아볼래." 티켓을 뽑아 어디를 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린 나는 종종 서울의 지하철을 타곤 했다. 유년의 이동수단 중 압도적인 주류였던 승용차를 타면 대부분 멀미를 하던 나에게 열차는 참으로 독특하고도 마음이 가는 교통수단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기차가 땅 아래로 지나간다니. 흥미를 자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요즘에야 카드를 찍어 요금을 내지만, 그 당시 현금을 넣어 뽑던 발권기는 너무나도 재밌었다. 아날로그가 주는 향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즐겁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특히 그 개표구. 당시의 개표구는 - 나이를 추측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금속 재질의 외관이 강렬하면서도 두꺼운 플라스틱 재질의 붉은 차단기를 갖고 있었다. 종이 표를 룰루랄라 넣고 가다 배때지를 두들겨 맞고는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나는 개찰구를 꽤나 무서워했었다. 인격이라고는 없는 자동화 기계와 어린 시절 나의 작은 키가 만들어낸 웃픈 에피소드랄까.


  이제는 그런 두려움 따위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사실 걱정이 되는 부분은 그 경이에 빠진 눈빛과 놀라움, 순수히 좋아하는 마음, 그것들도 함께 잊거나 잃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지하철도, 열차도, 발권기도, 개표구도 더 이상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비로운 경험을 갖기 위해서 종종 비싼 돈을 지불한다. 고급 식당이나 호텔, 행사 같은 것들이 주로 그 돈을 받아 우리를 모신다. 원래는 공짜였는데.


Kiddo - La Spezia / 2015 ©

   그렇게 경이와 두려움을 함께 잃어가는 과정은 승강장에 들어오는 기차보다 훨씬 느리고 자연스럽다. 그렇기에 알아채기 어렵다. 이러한 상실에는 선도 악도 없을 것이다. 분명 조금 덜 재미있어진 대신 놀라거나 엉엉 울 일이 더 적겠지. 그렇게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어간다. 조숙한 아이를 보며 안타까워하는 어른들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때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를 너무 빨리 시간에게 넘겨준 그 불평등조약이 속상한 것이다.


   대신 우리는 각자의 새 즐거움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요즘 꽂힌 것, 곳, 사람 등 자신의 취향을 잔뜩 늘어놓으며 나는 아직 즐겁다고 스스로와 타인에게 증명한다. 아기는 오늘 지하철을 봤다고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는다. 근데 지금의 나에게 그런 '즐거움의 증명'은 꽤나 유혹적이다. 어쩌면 즐거움을 찾는 것보다 즐거움을 찾았다고 소리 지르고 방방 뛰는 것에 우리는 중독되어 있을지 모른다. 민망한 보물 찾기처럼 말이다.


Kiss - La Spezia / 2015 ©

   얼마 전 한 친구는 나에게 연애가 유발하는 퇴행적 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받는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고 투정을 부린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그것을 과장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또 있었던 일을 자랑스럽게 늘어놓거나 짜증 나거나 슬픈 사건들을 하소연하기도 한다. 상호작용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어린아이의 모습과 닮는 경향을 갖는다. 이 또한 하나의 증명을 위한 싸움일지 모른다. 나의 유아적 면모를 보듬어줄 사람이 아직 있다고, 그것이 마땅히 너일 거라고 밝히는 논쟁. 혹은 우리의 잠재의식에 억눌려왔던 아이가 사랑의 느슨함을 틈타 뛰쳐나오는 것일까?


   나는 사랑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사실 인생에 대해서도 쥐뿔도 모른다. 왜냐면 그 둘의 모양은 그릇에 담기에 따라 달라서 잘 안다고 말하는 이는 물과 공기의 모양을 안다고 외치는 사기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종종 나는 어린 시절과 그 순수가 그립다. 또 그런 순수를 내게서 이끌어내는, 혹은 내가 이끌어내 줄 수 있는 인연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정말 그립고, 소중하다. 나 말고도 무수한 사람이 그 확실한 감정이자 사실을 경험했기에 전 세계의 시인들이 그렇게도 반복하여 노래했으리라.


   인생의 열차는 오늘도 달린다. 나는 그 여름 라 스페치아 역에서 다른 열차를 기다렸던 것처럼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다음 오는 열차를 탈지, 말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자 나의 여행이다. 어느 날은 승강장 벤치에 앉아 하늘만 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또 어느 날은 더 어린 유년을 그리워하며, 먼 미래엔 지금 이 순간을 그리워할 것을 안다. 그렇기에 더 소중하고 경이로운 오늘, 나의 신비로운 열차. 이 밤도 또 다른 하나가 철로 위를 미끄러지며 그렇게 나를 지나쳐 터널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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