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dman Dec 14. 2020

땅과 바다의 투쟁의 역사

<땅과 바다>/<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일본인 이야기1>

칼 슈미트, <땅과 바다 - 세계사적 고찰>, 미지북스, 2010

김시덕,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메디치미디어, 2015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 1>, 메디치미디어, 2019     


칼 슈미트, 김남시 옮김, <땅과 바다>, 미지북스, 2016

1. 

칼 슈미트의 <땅과 바다>에서 “세계사는 땅의 힘에 대한 대양의 힘의 투쟁, 대양의 힘에 대한 땅의 힘의 투쟁의 역사”라고 정의하며, "땅"과 "바다"라는 두 원소를 바탕으로 자신의 역사철학을 전개한다. 원소(elements)라는 말에는 기본적으로 요소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권역/영역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칼 슈미트는 이 책에서 인간이 어느 권역 위에서 생활하는지에 따라 어떻게 새로운 공간이 창출되고 역사가 만들어졌는지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는 “농부공화국 태생으로 순수한 땅의 권력”이었지만, “대양 권력이던 카르타고에 대한 투쟁을 거치며”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슈미트가 봤을 때, 땅의 세력이 온전히 자신의 실존을 다른 영역, 즉 바다 세력으로 옮긴 가장 중요한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 이전에는 땅의 실존이 바다의 실존으로 온전히 옮겨간 경우는 없었다. 해전이라고 하는 것도, 배 위에서 벌이는 육상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영국의 실존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공간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해양으로 진출하면서 공간 관념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확대된 것이다. 그 공간혁명이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문화적 전환이며 둘째, “끝없이 비어있는 공간의 개념에 대한 전환”이다. 특히 후자는 예술의 차원에서 “중세 고딕 예술의 공간 개념”의 폐지와 원근법의 발명으로 이어지며, 국제적 차원에서는 대항해시대 혹은 슈미트식으로 표현하면 “유럽이 새로운 땅을 취득한 시대”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칼 슈미트는 서양사에 한정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했지만, 김시덕의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와 <일본인 이야기 1>을 통하여 동아시아에서의 ‘땅과 바다의 투쟁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1>, 메디치미디어, 2019

2.

일본 역시 영국처럼 섬나라이나, 대표적인 ‘땅의 세력’이었다. 그런 일본이 변화된 계기는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양 세력과의 접촉이었다. 이는 앞서 말한 ‘전지구적 공간 혁명’이 불러온 결과이기도 하다. <일본인 이야기 1>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가톨릭의 전래와 일본의 세계화다. 일본으로 “그리스도교가 들어오자 당시 일본 현실을 비관하던 평민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수십만명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생겨났고, 나가사키와 같은 일부 지역은 교회에 바쳐져서 교회령이 되기도 했”다. 1547년에 예수회 선교사 하비에르는 동남아시아의 말라카에서 일본인 상인 안지로를 만나 일본에 선교할 것을 결심한다. 하비에르는 오토모 소린과 오무라 스미타다 같은 ‘가톨릭 다이묘’의 편의 아래 안정적인 포교 활동을 펼쳤고, 오다 노부나가는 가톨릭을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불교를 대체하거나 최소한 경쟁 관계로 만들어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통일 사업에 있어서 가톨릭의 이용 가치를 높이 산 오다 노부나가는 1568년부터 1582년까지 총 31번 가톨릭 신부와 만날 정도였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도 가톨릭 세력을 보호했다. 상업적 이익을 노리고 서양 세력에 접근한 이들도 있었으나, 동기가 어떻든 가톨릭은 일본 사회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였고 영지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말년에는 필리핀으로 추방당해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다카야마 우콘 같은 다이묘도 존재했다.     


가톨릭의 영향력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만들어놓은 국제적 네트워크망에 일본도 편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인 이야기1>에 나온 한 예를 들면, 하비에르 선교사가 개종시킨 다이묘 오토모 소린은 하비에르를 통하여 캄보디아 왕국과 독자적인 수교 관계를 맺었다. 다른 다이묘들도 무역을 통한 상업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가톨릭 선교사들과 커넥션을 만들려 하였으며, 더 나아가 가톨릭 다이묘들이 1582년에는 ‘덴쇼사절단’이라고 하는 소년사절단을 로마 교황청에 보내기까지 하였다. 일본뿐만 아니라 멕시코, 스페인, 포르투갈, 조선 등 ‘26 성인’의 “다양한 인종 및 민족 구성”, 예수회 신부 로드리게스가 “일본어를 유럽의 언어학적 관점에서 정리한” 사전인 <일본대문전>, 로마시민증을 받은 하세쿠라 쓰네나가, 독일인 의사가 영어로 출간한 <The History of Japan>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고, 이를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쇄국’이라는 단어가 나온 사실은 당시 일본이 어느 정도로 글로벌 네크워크에 들어와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 1600년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같은 프로테스탄트 세력도 일본에 들어왔다. 이제 일본은 스페인·포르투갈·영국·네덜란드 네 나라가 무역 이익을 두고 격돌하는 장이 된 것이다.           



김시덕,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메디치미디어, 2015

3.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영국이 해양적 실존의 기반을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16세기 중후반 이후 해양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실존을 바다로 옮겨 외부로 진출한 사건이 바로 임진왜란으로 볼 수 있다. 100년간 계속된 전국시대를 종결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럽 상인과 선교사를 통해 세계 지리에 눈뜨게 되었다.” 명을 넘어선 인도(당시 일본인의 관념에서 인도는 동남아였다) 정복은 이 흐름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도요토미의 조선 정벌도 오다의 유지를 이어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확장의 거점으로서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도요토미의 움직임은, 칼 슈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국처럼 일본의 실존을 대지에서 해양으로 옮기려 한 것에 대응된다.     


영국의 실존 변화가 ‘전지구적 공간혁명’으로 이어졌듯이, 일본의 실존 변화도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과 이후의 역사를 크게 바꿔 놓았다. 첫 번째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의 변화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반도는 그저 유라시아 동부의 변방으로, 한반도의 국가들은 “바다보다 육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현명한 생존 전략이었다.”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가장 위협이 될 세력들은 언제나 “유라시아 동부 평원”의 “기마 기술이 발달한 여러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유라시아 동부의 변방”이었던 조선은 이제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과 해양 세력 사이에 자리한 지정학적 요충지”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임진왜란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세력이 한반도 국가의 존속을 위협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한반도는 해양 세력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이 된 것이다. 반대로 전통적 대륙 세력인 중국(명)에게는 해양 세력의 “진출을 저지해야 하는 완충지”가 되었다. 한반도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격전지였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에 패전을 거듭했던 이유가 있다.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 언제나 북방에 있었기에 주력부대는 북쪽에 주로 있었고 남쪽에는 왜구 세력을 막을 정도의 병력만 배치했던 것이다.          



4.

또 다른 해양 중심지인 타이완은 동아시아에서 한반도와 함께 “두 개의 중심점으로서” 기능한 곳이었다. 본래 타이완에는 16세기까지 독립된 국가가 없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서양 열강은 “동남아시아의 자국 거점과 중국·일본 등 새로운 시장 간의 교역에서 중간 기착지”로서 타이완이 가지는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하여 그곳에 거점을 구축하였다. 한편, 명나라 멸망 이후에도 타이완의 가치는 한 번 더 상승했다. 정성공이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하고 타이완에서 명나라 부흥 운동에 전념한 것이다. 정성공-정경-정극상 세 사람은 “모두 스스로를 명나라의 신하이자 중국인으로서 인식했으며, 타이완 섬에 독립국가를 만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성공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타이완에 최초의 국가를 세운 것과 같았으며(실제 타이완에서는 그렇게 기념된다고 한다), 정씨 일가가 타이완의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청과 긴장관계가 유지되었을 것이다. “1500년대 일본열도의 전국시대에서 시작되어 임진왜란,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과 홍타이지의 대청국 건국, 정묘·병자호란, 청나라군의 산해관 돌파와 북경 함락으로 이어진 약 200년간의 연쇄반응”이 청의 타이완 정복으로 끝난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인 결과였다.           



5.

다시 시선을 일본으로 옮겨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발생한 권력의 공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차지하였다. 그 역시 초기에는 스페인의 무역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 포교 활동을 용인할 생각이었지만, 일본이 아니라 “바다 건너 로마의 권위에 복종하는 피지배민 집단”이 더 많아져서는 안 되겠다고 방향을 바꿨다.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인 오다 히데노부의 포교 사례에서 보듯이 당시 일본 지배층 구석구석까지 가톨릭 신앙이 침투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사 집단의 권력 독점을 위해 일본의 국가 성장을 멈추는 길을 택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바다의 세력(정확히는 선교사)을 몰아내고 해양적 실존을 끊어내 버림으로써 땅의 세력, 다시 말해 무사 집단만을 위한 국가를 만들었고, 이렇게 도쿠가와 막부는 시작되었다. 따라서 도쿠가와 막부 내내 자국인의 도항을 엄격히 금지하는 쇄국책을 펼치는 한편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네덜란드와만 제한적인 교류를 유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리하여 그들의 세계관은 다시 축소되었다. 다만 제한적이었다 해도, 네덜란드와 교류를 지속하였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점이다.

작가의 이전글 북큐레이터가 추천해주는 맞춤 그림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