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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man Dec 17. 2020

예언자적 설교

임걸,  <한국교회 신학사상>1,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참고문헌: 임걸,<한경직 설교론>, <<한국교회 신학사상>>1,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pp211~229

한경직 목사님은 개신교에서 설교가 중요한 이유를 3가지를 말한다.

1) 설교는 하나님이 복음을 전파하는 통로다. 즉, 설교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그 말씀을 받아서 대신 하는 것이다.

2) 설교는 개신교의 정체성이다. 실제로 루터나 칼뱅 등의 종교개혁자들은 성도들이 직접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설교를 중요하게 여겼다. 

(단, 모든 개신교 종파가 그런 것은 아니다. 개신교 소수 종파인 퀘이커교는 예배에서 설교는 커녕 찬송도 없다. 그저 명상을 하며 성령의 임재를 느꼈거나 깨달음을 얻으면 몸을 부르르 떨 뿐이다.)

3) 설교는 목회자의 존재 근거다. 한경직 목사님에게 있어서 목회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설교하는 사람'이며 목회자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하다. "오로지 설교. 오로지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을 위해 내(한경직)가 존재한다."

이렇듯 설교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 한경직 목사님은 4가지 설교 원칙을 제시한다.

1) 성서적 설교, 더 나아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 성경은 하나님이 특별하게 자신을 보이시는 도구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보이신다는 것을 기독교 용어로 계시라 한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이다.(반대로 일반계시도 있는데, 자연을 통한 계시가 일반계시 혹은 자연계시다) 따라서 설교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로써 성경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이 성서적 설교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중요한 내용이 '그리스도 중심' 설교이다. 이는 성경의 중심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도식화하자면, 구약은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신약은 실제로 오신 메시아 그리고 장차 다시 오실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 사도들의 설교도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 참조).

2) 목표가 뚜렷한 설교: 한경직이 말하는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이다. 인간의 심령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다. 목회자라면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새신자를 위해서 한 마디라도 해야 하며, 반드시 청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얘기해야 한다. 

3) 실존적 설교, 구체적으로 교리적/윤리적/일상생활을 다루는 설교 - 가장 모호한 개념이긴 하지만, 한경직 목사님은 수 차례에 걸쳐 실존적 설교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서 실존적 설교는 성경적으로 "설교자가 설교의 시기와 장소, 처지에 맞는 제목과 본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지금 2019년 한국에서 살고 있는 교인들이 청중이라면 그들의 상황과 고민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적 설교는 일상생활을 다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적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교인들의 개인적인 고민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4) 권위있는 설교: 여기서 말하는 권위란 당연히 목회자 개인이나 제도적 권위가 아니다. 바로 성경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말한다. 한경직 목사님은 설교자가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져야 하며, 성론충만해야 하며, 영혼 구원을 위한 간절함을 가져야 설교에 권위가 생긴다고 말한다. 또한, 설교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직접 삶으로 증명할 때 영적인 권위와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론을 보면, 한평생을 목회자로서 살아온 그분의 경험과 신학이 여실히 느껴진다. 특히 설교가 개신교와 목회자의 정체성이라는 점은 새겨들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며 실존적 설교는 한경직 목사님이 제시한 4가지 원칙 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한경직이 말하는 설교자와 가장 비슷한 사람은 구약의 예언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언자'라는 명칭 때문에, 이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점쟁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실제로 교부시대, 중세시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예언자를 그저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사람으로 이해했다.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들 수 있다. <신국론> 19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의 이사야~말라기서를(이 부분을 예언서라 한다) 해설하는데, 주로 그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한 예언에 포커스를 둔다. 그러나 예언자를 이러한 방식으로만 이해하면 예언자의 진정한 모습을 놓칠 수 있다.

예레미야, 다니엘, 엘리야 등의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예언자보다는 선지자가 더 낫다고 본다. 先知. 미리 안다. 무엇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아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사람. 이것이 그들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당시와 선지자들의 말을 보면, 그들은 사회정의를 외쳤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문제점과 타락한 정치,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뜻과 정의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

(아모스 5장 22-24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

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장 6-9절)

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

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미가 4:3)

설교자와 설교는 이러한 예언자적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예언자들이 그 시대를 꿰뚫어보고 그 시대에 맞춰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이교의 신인 바알을 섬기던 북이스라엘에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을 드러냈던 엘리야, 바빌론의 예루살렘 점령과 이스라엘의 해방을 예언한 예레미야, 바빌론 포로 살이 중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여 유대인 포로들에게 힘을 준 에스겔. 심지어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예언자라고 할 수 있다. 

예언자는 성경에서만 나오는 인물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 다스려지는 하나님나라를 세우려 부패한 정치권력과 악습과 싸운 인물들은 수없이 많다. 문둔병의 성자 성 다미앵,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최후까지 히틀러 나치에 굴복하지 않고 죽기까지 대항했던 본회퍼,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적 체제와 식민지 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던 요시노 사쿠조,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님과 정의구현사제단, 마틴 루터 킹, 장기려 박사, 함석헌,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노동자의 예수 전태일, 문익환 목사님.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 노력하셨던 옥한흠 목사님, 모두 그 시대를 살아간 예언자들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속세와 연을 끊고 산속에 은둔하듯이 신앙생활을 하는 '종교 히키코모리'들이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나의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이 땅 위에서 당당히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중요한 순간에 중립을 지키는 것은 참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 비겁함의 표본이다. 진정한 설교자는 설교에서 사회/정치/경제구조의 문제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님의 실존적 설교론에서 아쉬운 대목이 있었다. 한경직 목사님은 청중의 실존적 상황을 전제하여 설교하였기 때문에 강해 설교보다는 실천적 적용과 교훈 중심의 제목설교였다는 것이다. 물론 최소 2천년의 시간차를 가진 성경의 구절을 우리 시대에 맞춰 적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한경직 목사님이 말한 실존적 설교론의 취지일 것이다. 우리가 옛 고전을 읽을 때 주저하고 불평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게 지금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성경이 아무리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날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그냥 두꺼운 잠오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과 실천적 적용 위주의 설교는 자칫하면 성경 내용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자의적인 해석을 낳을 수 있다. <한국교회가 잘못 사용하는 성경 해석 101가지>라는 책을 보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사용하는 잘못된 성경 해석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은 성경 구절에 대한 지나친 자의적인 해석이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니"를 비전, 믿으면 모든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비전이니 꿈이니 하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이렇게 성경을 전체 맥락에서 파악하지 않고, 눈에 띄는 구절 하나만 떼어내서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가장 피해야할, 건강하지 못한 성경 독법이다. 심지어 설교가 이러하다면, 그 설교는 좋은 설교일 가능성이 낮다. 

따라서 목회자는 청중에게 윤리적 덕을 세우고 실생활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말도 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머넞 성경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해야 한다. 자기 해석이 맞는지, 다른 학자나 목회자는 어떻게 해석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설교는 그냥 좋은 덕담해주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옥한흠 목사님, 이동원 목사님,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팀 켈러가 전부 깊이 있는 성경 연구와 실천적 적용이 균형을 이룬 사례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전에 "평양대부흥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옥한흠 목사님이 설교를 맡았는데, 이러한 얘기를 하셨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는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던지, 회개라던지, 순종이라던지, 거룩이라던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한다면 부드럽게 달래듯이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목회자가 교인들의 개인적인 영적인 문제와 관심사가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이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너무 교인들에게 얽매이면, 옥한흠 목사님의 고백처럼 청중들이 좋아할만한 말씀 위주로 설교를 할 수 있다. 예수님 믿기만 하면 천국가고 온가족과 집안이 형통하고 축복받는다, 모든 꿈이 이뤄진다, 비전을 가지라, 믿는대로 이뤄질지어다. 이러한 기복신앙적 주제는 목회자가 설교를 무미건조하게 읽기만 해도 저절로 아멘이 튀어나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청중이 듣고 싶은 설교가 아니라 청중에게 필요한 설교라고 생각한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그가 조국의 멸망 때문만은 아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은 망하고 유대민족은 70년 동안 바빌론 밑에서 노예생활을 할 것이라고 예언하여 당대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예레미야의 뜻을 이해해주지 않았기에 그는 외로웠다. 미움을 받을 게 뻔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강권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유명한 선지자였던 하니냐는 예루살렘인들에게 인기만점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바빌론을 물리칠 것이다, 예루살렘은 무사하다는 청중이 좋아하고 듣고 싶어하는 설교와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비명횡사다. 거짓 선지자의 최후다. 

목회자가 가져야하는 인식은 자신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절대로 타협불가하다는 것이다. 한경직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설교의 주체는 하나님이며 설교자는 그 대언자임을 자각해야 한다. 예레미야의 설교 자세를 기억하고 묵상해야 한다. 청중들이 싫어할 것 같아도 진리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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