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 기독교인과 한국의 현대
이 책의 목적은 한국현대사에서 기독교, 구체적으로는 서북 출신 월남 기독교인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것이다. 윤정란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남한 교계와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 계기는 한국전쟁 시기 구호물자 사업의 독점이었으며, 북한과 소련의 탄압 기억 속에서 형성된 강한 반공 정서가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과 결합하면서 이들은 남한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호물자 사업은 미국 선교단체와 연결된 것이므로, 결국 서북 기독교인들은 미국과의 커넥션과 반공주의로 성장했다 할 수 있겠다.
서북이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등 대부분의 북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계에서 서북 지역이라고 지칭하는 곳은 북장로교가 관할했던 평안도와 황해도 이북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한국개신교 최초의 세례자가 나오고, 1898년에 전체 장로교인 중 약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서북민일 정도로 개신교 교세가 강했던 지역이다. 서상륜, 함석헌,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 한경직 등 주요 기독교인 인물들이 또한 서북 출신이며, 1907년 평양대부흥는 이 지역에서 기독교가 더욱 깊숙하게 자리 잡아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게 만든 사건이었다. 일제의 강요 속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까지도 서북 기독교인들은 이북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집단이었다. 이들이 대거 월남하게 된 계기는 소군정과 북한 정권의 탄압 때문이었다. 신의주 학생 사건 등 당국과의 마찰이 거세지는 동시에, 소령군 사령부는 북한 정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을 정치에서 점차 배제하였다. 그리고 토지개혁법으로 경제적 기반까지 잃은 기독교인들은 월남을 단행했다. “월남한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피난민 교회, 특히 한경직의 영락교회를 거점으로 삼아 월남한 목사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월남한 서북 기독교인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독점”하여 장로교 내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기독교인들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서 저들을 도와주겠다는 뜻에서 구호물자를 기부했고, 미국교회협의회(NCC)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원과 협력을 받는 기독교세계봉사회(CWS)가 이러한 구호물자를 한국의 전재민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한국 구호 활동을 책임지는 이가 북장로교 선교사였다. 각 교파는 서로 간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선교지 분할 정책을 펼쳐 교파별로 특정 지역을 맡았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북장로교의 선교지는 서북이었다. 그래서 월남 기독교인과 북장로교 사이에 더욱 밀착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CWS가 미국 정부에도 영향력이 있던 NCC와 WCC와도 관계가 있다 보니, CWS를 통한 구호물자를 독점한다는 것은 곧 WCC와 NCC와의 관계를 독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장로교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한경직을 비롯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장로회 총회를 주도할 정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방대한 구호물자를 독점할 수 있게 된 한경직과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한국 정부, IMC, WCC, 미국 NCC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남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주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승만은 이러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가진 미국과의 커넥션이 유용하다고 여기면서도, 휴전협정에서 “언제든 자신보다는 미국의 입장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WCC 용공설을 이용하여 서북 출신 기독교인과 갈등 관계에 있던 고신파로 하여금 휴전협정에 찬성하는 WCC와 NCC뿐만 아니라 이들로부터 지원을 받고있는 서북 출신 기독교인까지 용공으로 몰아붙이도록 부추긴 것이다. 월남 기독교인과 WCC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해서였다. 참 이승만다운 비열함과 옹졸함이다.
한편, 서북 기독교인은 구호물자와 더불어 반공 헤게모니를 통하여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쟁고아 사업(4장), 서북청년회(5장), 승공 담론(6장)을 통하여 이들은 박정희 정권과의 밀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전쟁고아 사업은 빌리 그레이엄과 월드비전 등 미국 복음주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미국인들을 다시 냉전 외교 정책에 동참시킨” 한편 “미국과 한국이 가족애에 바탕을 둔 혈맹적 관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전쟁고아 사업을 주도한 미국 복음주의 세력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던 이들은 역시 한경직을 비롯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이 관계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부정적인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적극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과 서북 기독교인들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한경직 세력은 그 후에도 박정희 정권이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북 출신과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는 서북청년회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강력한 전투적 반공주의 아래 모인 서북청년단은,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수 십 명의 남로당원들”이 입학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을 결정했다. 그래서 조선경비사관학교 5기생의 3분의 2가 서북 출신이었으며, 8기생에서도 서북 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5기와 8기는 박정희와 함께 5·16 쿠데타를 주도한 중심 세력이다.
서북 출신 월남 기독교인들이 박정희 정권을 지지할 수 있던 또 다른 요소는 승공 담론이었다. 북한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이들이 조직한 서북청년회, 영락교회, 이북신도대표회는 전투적 반공주의의 선봉이었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도, 전쟁의 원인을 공산주의의 야욕으로 돌리고 공산주의를 마귀의 세력으로 치부하는, 전투적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참고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WCC의 에큐메니컬 노선을 지지하는 맥락도 WCC가 반공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적 반공주의는 1950년대만 가도, 대내외적 요인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은 전후 재건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투적 반공주의에 회의가 일었고, 이제 반공주의는 새롭게 정의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반공은 이제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의 승리, 구체적으로 말해 “민주주의 질서 확립과 사회적 빈곤의 제거”의 성공으로 정의되었다. 따라서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유린한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여 KNCC 등 서북 기독교인은 4·19혁명을 지지하는 한편, 동시에 탈냉전·중립화 통일론으로 이어진 4·19 이후의 흐름에 반대하고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모순적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들에게 박정희와 군사정변 세력이란 “공산주의 체제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실질적 반공 체제의 확립인 ‘승공’”을 실현시킬 세력이었고, 한경직과 김활란이 미국에 친선 사절단으로까지 가서 미국을 설득하려 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군사정권에 의해 승공 담론은 국시로 승격되었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미국과의 커넥션과 반공주의를 통하여 남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으며, 더 나아가 권력층과도 유착 관계를 형성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초청 여의도 집회는 어떤 면에서 서북 기독교인과 정권 사이의 유착 관계의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의도 집회에서는 정부의 독재 행태에 대한 예언자적 성찰과 비판은 결여되어있다. 반공주의만 있었을 뿐. 오늘날에도 친미/반공/보수 세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이렇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기독교인의 죄악에서 찾았으며, 익히 일려져 듯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 학생 두 명을 용서하며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탄압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내려온 이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는 이해 간다. 그러나 그 와중에 손양원 목사처럼 포용의 손길을 내미는 목소리가 없었다는 점은 다소 서글퍼진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는 이전 세대의 역사를 대부흥의 역사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해방 이후의 역사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국 교회의 역사를 다시 봐야 하겠다.
여담. 제5장 ‘서북청년회 출신들의 정치적 배제와 부활’에서는 저자의 논지가 다소 느슨해진다. 우선 서북청년회와 서북 출신 기독교인의 관계가 충분히 해명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한경직과 베다니교회의 청년부에 서북청년회 회원이 다수 존재했고 서청이 자신의 역사적 정체성을 서북에서 찾았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베다니교회 청년들이 서북청년회를 주도했다는 증언도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서청계 중 5·16에 가담한 이들과 기독교 세력 사이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박정희 정권 요인 중 서청 출신과 서북 출신 기독교인 사이에는 단지 북한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다는 공감대만 형성되었는지, 아니면 더 강력한 연결고리가 있었는지. 서청과 서북 출신 기독교인은 1949년 이후에도 계속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인가? 이 책의 중점적인 연구 대상이 서북 출신 기독교인이다 보니, 5기생과 8기생이 서북 출신 기독교인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더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아쉽다.
또 4장 ‘전쟁고아 사업과 한경직’에서도 한경직이 “어린이 합창단을 통해 한미 간의 혈맹적 관계를 다시 확인”시켰다는 표현 역시 더 근거가 제시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어린이 합창단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음은 알겠으나, “어린이 합창단을 통해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라는 결과에 대한 과정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