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사소한 '자비'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by 풍경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사소함’은 나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떠올리게 했다. 판도라가 호기심에 못 이겨 주술이 담긴 상자를 열자, 이 인간세상을 온갖 죄악과 재앙으로 가득 차게 만들 가난, 질병, 전쟁, 죽음 등의 악이 튀어나오고, 그 절망의 순간에 뒤이어 우리를 구원하고 안도케 한 ‘희망’이 나온 것처럼, 그렇게 펄롱의 사소한 ‘자비'가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을 닮았다. 그러고 보니 작가 키건도 입 다문 판도라의 상자 같다. 전작 맡겨진 아이들에서 입다물기 좋은 절호의 기회를 놓쳐 많은 것들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는 대사처럼 키건은 이 책에서 입다물기 좋은 기회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키건의 ‘함축’과 ‘절제’는 말하지 않고 말해주고, 키건의 모든 ‘은유’는 알듯 모를 듯한 ‘암시’의 깊이만큼 현실이 된다.


1985년 아일랜드의 막달레나수녀원에서 고통받았던 여성들과 아동들에 대한 헌사라는 글귀로 이 책이 시작된다. 고요히 퍼지는 마법의 주술처럼, 아일랜드의 소도시 뉴로스의 초겨울로 시곗바늘을 돌리고, 짙은 배로 강의 부풀어 오르는 흑빛에 무언가 슬픈 눈빛이 느껴지고, 그 눈빛은 기꺼이 나의 시선이 된다. 까닭 없이 입술을 깨물며 배로 강의 물결을 들여다보다, 그녀가 전하는 척박한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듣는다. 말하지 않고 말하는 신비한 복화술사의 입술인 듯, 침묵하는 듯, 그녀의 음성이 들린다. 그렇게 그녀의 읊조림은 나뭇가지의 우울한 빛깔에도 걸려 있고, 계절과 시간의 어디엔가에 스며있고, 저녁까지 마를 것을 늘 믿지 못하는 빨랫줄에 축축한 셔츠와 그마저 가지고 있지 않은 아이들과 그들의 어머니들, 배로 강에 담긴 도시의 옛이야기에도 출렁이듯 담겨있다. 그리고 그곳에, 새벽부터 밤까지 석탄과 목재를 나르며 살아가는 주인공 펄롱의 삶과 일상이 있다. 땀과 석탄으로 얼룩진 그의 무거운 발걸음과 우울한 소도시의 풍경이 그렇게 나의 방턱을 넘어 들어왔다.


글의 서문에 아동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노라는 아일랜드의 선언문이 있다. 진부해 보였던 선언문이 책을 마치고 나니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의 가치를 명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하여서는 안된다는 선언문은, 그 명시된 인간의 기본 가치를 짓밟고 살아가는 이들을 경고하는 메시지이기도 했고, 겉으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외치며 실상은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추악한 사회에 대한 탄식으로도 읽혔다. 그렇게 선언문은 인간 존엄을 선포하고 동시에 조롱한다. 키건은 말하지 않고 전할 뿐, 그녀의 진위는 파악할 길이 없다. 그녀의 글은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는, 낮은 융점으로 내 안에 녹아드는 목소리였다. ‘어떤 것에 대해 신이 본래 부여한 상냥한 마음보다 더 상냥한 마음일 때 감상적’이라는 블라이스의 글귀를 그녀가 좋아할 것 같다. 키건은 따뜻하고도 섬세한 감성을 유지하며 나를 상냥한 마음으로 이끌어 가지만 감상적이 되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 책의 주인공 펄롱은 혹독한 시기 아일랜드의 한 척박한 소도시에서 열여섯 살 엄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아니 그보다 더없이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다행히 그들을 거두어 준 미시즈 윌슨의 ‘자비’ 로운 집에 살았으나, 펄롱은 그 엄마마저 열두 살에 잃었다. 모든 것을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것을 펄롱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런 어린 시절과 또래들로부터 멸시받던 시간을 묵묵히 견디어내고 펄롱은 잘 자랐다. 신뢰할 만한, 성실한 개신교도로서, 일했던 곳의 주인으로부터 석탄과 목재를 나르는 일을 이어받아 사업장을 꾸리고, 지금은 소도시에 살고 있다. 펄롱은 부지런하면서도 현실적인 아내 아일린과 그의 형편에 비해 너무나도 잘 키운 다섯 명의 딸들을 성실히 지켜내며, 밤낮으로 석탄과 목재를 나르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중년의 가장으로서, 삶이 힘들고 버겁지만 그래도 그의 인생 중 가장 안정된 시기를 지나는 듯하다.


어느 크리스마스를 앞둔 춥고 혹독한 겨울, 막달레나 수녀원으로 석탄 배달을 간 펄롱은 우연히 신발도 없이 경당의 바닥을 닦는 어린 소녀들을 목격한다. 그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펄롱은 물에 빠져 죽게 그저 강까지만 데려다 달라하는 한 여자아이의 불편한 부탁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겪었을 양심의 가책과 힘겨움이 오롯이 느껴지는 대목들이 이어진다. 그의 불우한 유년의 기억이 굳이 더하여지지 않아도, 수녀원의 착취받는 소녀들을 모른 척 지나친다 한들 우리는 그를 비난하기 어렵다. 그 역시 한 치의 흔들림으로 곤두박질쳐질 수 있는 여전히 가난의 경계에 버티어 선 하층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딸들이 다섯 명이나 있다. 작은 마을에서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수녀원에 척지는 순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세인트 마가렛 여학교에 이 다섯 명의 딸들을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동안 그가 지켜온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그의 동정심이나 자비와 친절이 사치스러운 감정일 수 있으며, ‘어디든 운 나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라는 현실적인 아내의 답변은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도 흔하게 듣는 말이다. 왠지 선하고 푸근할 것 같은 식당 여주인 미시즈 케호 조차 친절은 거두어야 하며, ‘한통속이 된 자들’ 앞에서 누군가의 불행에 눈감는 것이 최선이라는 슬픈 충고를 전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선하기 어렵고 명예를 지키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톨스토이의 글귀는 이 아일랜드의 가난한 소도시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세상의 냉혹함과 두려움을,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척박한 현실을, 사소한 ‘자비'마저도 일탈이 되어 모든 것을 잃는 일이 너무도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펄롱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펄롱은 그 ‘한통속의 수녀원’에서 소녀를 데리고 나온다. 소녀와 집으로 오는 길, 펄롱은 그의 특별한 것 없던 인생에 비로소 밝게 빛나는, 알았더라면 기꺼이 그 대가를 지불했을, 딸들이 태어났을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어릴 적 그와 엄마를 받아준 미시즈 윌슨의 일상 속 친절들을 마주하며, 그가 데리고 나온 이 소녀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떠올린다. 오직 신만이 앞으로 펼쳐질 날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순간 일렁였던 벅찬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광활한 우주에 떠도는 먼지 같은 삶의 살아있는 의미, 살아 숨 쉬는 모든 이들이라면 누군가에게 단 한 번이라도 받았을 아니면 베풀었을 사소한 친절과 자비에 대한 기억들, 그때는 몰랐고 이제 알게 된 그래서 답할 수 없는 감사와 그리움, 그 감사와 그리움이 시간의 겹과 허공을 떠돌다 비로소 쉴 곳을 찾은 평안함, 앞으로 펄롱이 지불할 사소한 친절과 자비가 다가올 두려움과 고난보다도 훨씬 더 밝고 강한 것임을 깨닫는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신이 판도라의 상자 속에 담았던 ‘희망'과 닮아있음에 감사했다. 펄롱은 ‘최악의 일은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라는 마지막 독백을 남긴다.

키건은 여기서 이 책이 끝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숨겨놓은, 잊히고 사라진 저 깊은 곳의 양심을 끄집어낸다. 최악만 피했을 뿐이라는 펄롱의 선택이 언젠가 그와 그의 인생의 지협이 연결되는 시점에 신이 그에게 선물한 최고의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가 살아온 세월 속에 있었던 모든 자비와 친절의 목소리와 무심한 상냥함마저도 사실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 사소한 자비로 피어난 영혼은 어둠에 물들지 않을 수 있었음을, 알았거나 알지 못했던 사이 그의 인생에 관여하고 있었음을, 석탄을 뒤집어쓴 배달부가 그래도 신사 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음을, 까만 얼굴에 드러난 하얀 미소의 명예를 간직할 수 있었음을 펄롱이, 꼭 그가 알았으면 한다. 오랜 세월 누군가가 날마다 보여준 친절과 자비와 사랑이, 가르치고 격려했던 누군가의 말과 행동 혹은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는 사소한 것들까지 그의 심장과 양심에 누적되어 그의 인생이 되었음을 알기에 그의 선택이 두렵지 않다.


마지막으로 작가 키건이 나에게 떠맡긴 많은 바람을 되뇌어본다. 힘든 이에게 손을 거둔 ‘자비롭지 않았던 행동’을 변명으로 남겨두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자비 없음’이 아닌 ‘무자비함’으로 돼 날아올 수 있음을 두려워하기 바란다. 죄악을 사소한 것으로 인지하고 멸하지 않은 오이디푸스가 결국 자신의 눈을 찌르며 절규하는 비극이, 그 사소한 것들마저 외면하고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가벼운 위협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거나 그땐 알 수 없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 비로소 알게 된 ‘친절’과 ‘자비’로 인해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이제야 깨닫게 된 내 인생의 지협으로 이어진 그 무수한 친절과 사소한 자비들이 펄롱의 것과 일치됨을 느끼며, 또 어떤 이의 인생으로도 이어지길 바라며, 앞으로도 누군가의 친절과 자비가 사소할지언정 무수한 기억, 무수한 희망으로 계속되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본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