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자? 등장
지애가 사라진 뒤에도 회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정우 옆자리에 성주가 앉게 된 것 정도가 달라진 전부였다. 솔직히 말하면, 지애가 사라진 것도 정우와 매일 그들을 놀리던 성주를 제외하면 직장 내 누구에게도 큰 영향은 없었다.
성주는 남은 자리를 발견하자마자 근무 장소 변경을 요구했고, 곧 정우와 같은 시간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회장을 만날 방법을 고민하던 정우에게, 성주는 예상치 못한 추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성주는 근무 내내 정우에게 말을 걸고,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따라붙었다. 정우는 무시를 기본 태도로 삼았지만, 어느 날 성주의 한마디가 상황을 바꿔버렸다.
“그거 알아? 지애, 사실 L.S에게 돈 빌린 사람의 가족이래.”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누구한테 들은 거야?”
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성주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사무실 전체의 시선이 둘에게 집중됐다.
성주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지애는 안 뺏어갈 테니까. 농담한 거 가지고 화내네…”
다른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정우도 농담이라는 말에 냉정을 되찾았지만, 성주의 속삭임은 그를 놀라게 했다.
“걱정 마. 다 말해줄 테니까. 대신 너도 네가 꾸미는 짓을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두식, 세희… 그 사람들의 안전, 보장 못 하니까.”
성주는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고, 정우는 그 말을 듣고서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성주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왜 회사에 고발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주는 언제나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장난을 던지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과는 뛰어난,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근무가 끝나고 정우가 집에 가려는데, 뒤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성주였다. 그는 차에 타라는 손짓을 했고, 정우는 어쩔 수 없이 탔다. 마음속으로는 경계심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성주는 그런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그리 경계하지 마. 고발하려면 이미 고발했을 테니까. 그리고 솔직히, 너희가 만드는 상황을 보는 게 더 재미있어 보여서 그래.”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한참 달려, 어느 한적한 시골에 도착했다. 바로 드림 브레이커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정우는 그곳을 보며 깨달았다. 성주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 성주가 말했다.
“자, 어디 한번 서로의 패를 까보실까?”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더 들어야 할 내용이 있나?”
정우가 되물었지만, 성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침묵했다.
정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 네가 말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이야기하지. 일단 우리는 L.S를 무너뜨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니, 그 이상은 말하지 마. 이건 게임이야. 서로 패를 한 장씩 내는 게임인데, 너무 많은 정보를 주면 너무 빨리 끝나잖아.”
성주는 정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뒤로 둘은 이상한 ‘TMI 교환’을 시작했다. 서로의 인생 노래,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까지 이야기하며, 정우는 점점 짜증이 났다. 한시라도 빨리 지애를 구해야 하는데, 성주는 쓸데없는 TMI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성주가 말했다.
“우리 회사 입사 가능한 시기는 3~4월, 9~10월이야.”
정우는 순간 깨달았다. 성주는 자신이 5월에 입사했다고 말했는데, L.S는 공식적으로 그 시기 외에는 입사할 수 없다. 즉, 성주의 말은 거짓이거나, 다른 방법으로 입사했음을 의미했다.
정우는 성주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한 말에 거짓은 없겠지?”
“당연하지.”
정우는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첫째, 지애처럼 사채를 갚기 위해 들어왔거나, 둘째, 임원의 자식으로 낙하산 입사했을 가능성. 만약 부회장의 아들이라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우는 제안했다.
“우리 이번엔 OX로 서로의 패를 까보는 게임을 해보는 건 어때?”
성주는 크게 웃으며 먼저 질문을 던졌다.
“지애에 대한 너의 마음, 진심이니?”
말문이 막힌 정우. 성주다운 질문이었지만, 답하기 어려웠다. 물론 지윤이라는 인물은 완전히 떠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지애에 대한 마음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답 안 해도 돼. 이미 답을 봤거든.” 성주가 먼저 말했다. 정우는 당황했지만, 성주의 재촉에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정우도 질문을 던졌다.
“성주, 당신은 부회장의 아들이냐?”
성주는 잠시 당황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네? 난 분명 회장의 아들이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L.S에서 회장은 허수아비겠지. 나는 묻고 싶은 건, 우리가 L.S를 무너뜨리려는 걸 알면서도 왜 고발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우리의 목표에 네 아버지도 포함돼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성주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그거에 대한 답은 이미 해준 것 같네.”
차는 어느새 정우의 집 앞에 도착했고, 성주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3일 후, 이 쪽지에 적힌 곳으로 가.”
정우가 쪽지를 받아 들자, 성주는 차 밖으로 던지고 떠났다. 주소와 시간이 적힌 쪽지를 들여다보며, 정우는 성주가 남긴 마지막 말, ‘재밌어 보였거든’이라는 의미를 곱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