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의 생일
상태가 좋아지고 나서… 드디어 이틀 동안 기억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다음날이 돼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큰 기쁨일 줄은 몰랐다. 현지도 사춘기가 거의 끝나가다 보니 요즘 집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아침 먹는 동안 내가 계속 웃고 있으니까 현지가 “아빠… 진짜 괜찮아..?”라고 진심으로 걱정하듯 물었다. 현지는 내가 평소보다 심하게 이상해서 물은 거겠지만, 나는 그냥 너무 행복해서 그랬을 뿐이었다.
현지는 모를 거다. 하루를 더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내가 아빠라서 그런지, 아니면 딸이 현지라서 그런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찬다.
11월. 낮엔 괜찮아도 아침엔 제법 춥다. 설거지 끝내고 음식물쓰레기 버리러 가는 귀찮은 시간인데도, 그날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긴 복도를 걸으며 창 밖을 보니 하늘이 유난히 예쁘고,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 평화로운 기분도 오래가진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웃을 마주친 것이다.
“어머, 현지 아버님~ 오랜만이네요.”
예전 같았으면 그냥 “아… 예” 하고 까먹은 게 있다면서 다시 돌아갔겠지만, 그날은 기분이 좋아서 환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시나 봐요?”
“네, 좀 쌓여있더라고요.”
이웃은 봉투를 한번 보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현지 요즘 괜찮죠? 한 달 전에 말 걸었던 적이 있는데 너무 차갑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현지 사춘기 절정이었다. 말만 걸어도 분위기가 싸해지고,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서로 엇갈리고… 만약 내가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랬을까 싶어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무 말도 없이 밥만 먹고, 인사도 없이 학교에 가고, 늦게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울컥할 뻔했지만, 이웃 앞이라 담담히 말했다.
“아, 그때는 사춘기 와서요. 지금은 괜찮아요.”
“아유, 다행이네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걱정했어요.”
이웃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웃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이웃이 먼저 내리려던 순간, 뭐가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서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곧 현지 생일이죠?”
처음엔 단순한 인사였나 했는데, 이웃은 이어서 조금 미안한 듯 말을 덧붙였다.
“제가 현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봤잖아요. 시간이 참 빠르네요. 작년에도 케이크 들고 가던 거 본 것 같은데… 벌써 또 생일이라니.”
그러더니 내 표정을 보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예전엔 이런 거 잘 챙기는 편 아니셨죠? 그래서 제가 더 기억에 남아요. 현지가 예전에 ‘아빠가 깜빡해서 속상했다’고 툭 던지듯 말하던 게 있어서…”
나는 순간 뜨끔했지만, 그분은 바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쁜 뜻은 아니에요! 요즘은 정말 달라 보이시니까요. 현지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좀… 부드러워지던데요?”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요, 애들 사춘기 지나면 생일 같은 게 더 중요해진다더라고요. ‘아빠는 내가 어떤 시기라도 챙긴다’ 이런 느낌? 오래 남아요. 저희 애도 그랬어요.”
나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제대로 챙겨주려고요.”
“잘하셨어요. 요즘 너무 밝아 보이셔서… 저도 괜히 기분 좋네요.”
그분은 손을 한번 흔들며 걸어갔다.
그 짧은 대화가 예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집에 돌아와 달력을 넘기니 11월 7일에 별 네 개와 함께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현지 생일 절대! 절대! 잊지 말 것!!!’
아마 예전에 내가 일기 보는 걸 깜빡할까 봐 과거의 내가 스스로 적어둔 거겠지.
이번엔 제대로 챙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일날 주말에는 근처 펜션으로 여행을 가기로 계획하기로 했다. 냇가에 가 놀고, 고기도 구워 먹고, 밤엔 불멍도 하고....
현지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물론 생일당일의 친구와의 시간을 뺏으면 안 되지만 주말에는 나에게 시간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생일 축하 자체도 중요하지만… 사실 이 여행은 곧 고등학생이 되는 현지가 나와 놀아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현지를 보내줘야겠지만, 지금만큼은 조금 더… 한 발 더 가까이 있어도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