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믿음이 아니라 태도에 대하여

05. 신을 말하지 않고도 신성을 말할 수 있을까

by LumiTo



삼일신고를 삶의 문장으로 읽다



신이라는 단어는

쉽게 사람을 멈추게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멀고,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무겁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신을 말하는 순간

이야기를 멀리 보내버린다.


하지만 삼일신고의 문장들을 읽다 보면

이상한 감각이 든다.


이 글은

신을 크게 부르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신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신성은

숭배의 대상이라기보다

삶을 다루는 방식에 더 가깝다.


얼마나 간절히 믿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정직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같은 태도를

반복하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신성을 특별한 상태로 생각한다.


기도하는 순간,

깨닫는 경험,

설명할 수 없는 감동 같은 것들.


하지만 그런 순간이 지나간 뒤

삶이 그대로라면

그 신성은

어디에 머물렀던 걸까.


삼일신고는

그 질문을 직접 던지지 않는다.

대신 이런 식으로 돌아온다.


지금의 태도는

그 경험과 이어져 있는가.


신성을 말하면서

타인을 함부로 대하고,

옳은 말을 하면서

자신에게는 느슨하다면,

그 신성은

아직 삶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문장들은

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삶을 살핀다.


말과 행동 사이,

생각과 선택 사이,

이상과 반복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는지를 묻는다.


신을 말하지 않아도

신성은 드러난다.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지,

불편함 앞에서

어디까지 자신을 지키는지,

타인의 삶을

어떤 무게로 대하는지.


그 모든 태도 안에

이미 신성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성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에 가깝다.


이미 가지고 있지만

삶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감각,

혹은 너무 익숙해져서

의식하지 못했던 기준.


삼일신고는

그 감각을 다시 꺼내

삶의 전면에 놓는다.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증명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지금의 태도가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가만히 보게 만든다.


어쩌면

신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신성이

이미 삶 속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음 글에서는

이 신성이

왜 그렇게 자주

삶에서 어긋나는지,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벗어나는지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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