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뭉게구름의 잔해가 초록 잎의 끝단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날이었다. 그녀와 생전 처음 뒷산을 오르던 길, 비는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습기를 머금었고, 이어진 유월의 뙤약볕은 채찍처럼 등을 내리쳤다. 유난히도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가파른 능선도 아니건만, 후텁지근한 바람에 밀려 나온 땀방울이 눈가를 적셨다. 그날은 내 생애 가장 눅눅하고 꿉꿉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함께 나가자고 했다. 대충 걸친 운동복 바지와 늘어진 티셔츠 차림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옷차림은 가벼웠지만 마음은 한 걸음조차 버거울 정도로 천근만근이었다.
'왜 하필 산에 가자는 거지? 혹시 시험을 망친 걸 알았나'
'가방 속 담배를 봤나? 최악이네. 아니면 앞머리를 탈색한 걸 눈치챘나?'
억울했다. 담배는 호기심에 산 것일 뿐, 아직 피워보지도 않았다. 염색도 아니고 그저 부분 탈색이었다. 이 정도로 문제아 축에 끼기에는 분했다. 숱한 번뇌를 반복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정상을 향해 걸었다.
- 엄마, 꼭대기까지 가요?
그녀는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다. 거대한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차마 입술을 떼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살얼음판 같은 그녀의 뒤를 눈치껏 따랐다. 바람에 땀방울이 서늘하게 식어갈 즈음,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상에 닿았다. 발아래 펼쳐진 오색 지붕과 난립한 빌딩들. 그 풍경 위로 찰나의 낭만적인 기대가 스쳤다. 드라마 속 대사처럼 "세상을 넓게 보라"며 용기를 주려고 나를 부른 건 아닐까.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 여기서 너 죽고 나 죽자.
그녀의 선전포고는 정적을 깨고 날아든 투박한 돌덩이 같았다. 파문이 일기도 전에 이어진 말은 나의 세계를 뿌리째 흔들었다.
- 왜 그딴 애들이랑 담배를 피워?
불길한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법이 없다.
- 핀 적 없어.
- 선생님이 너 담배 피우는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린다는데, 너 정말 이런 식으로 살 거야?
엄마는 아빠 뒷바라지에 너희 먹여 살리느라 온몸이 으스러지는데,
너까지 엄마 죽는 꼴을 봐야겠니?
이미 질문의 형식을 빌린 사형 선고였다. 나는 이미 담배를 피우는 낙오자였고, 엄마의 생을 갉아먹는 가해자였다. "요즘 잘 지내니?" 같은 따뜻한 문장은 애초에 우리 사이에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녀의 감정은 늘 해일처럼 밀려와 내 마음 따위를 집어삼켜 버렸다.
왜 우리에겐 이토록 서글픈 반복만이 남았을까. 가세가 기운 집안, 병든 아빠. 누군가에게 이 원망을 쏟아내야만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아픈 아빠를 탓하기엔 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엉킨 실타래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결국 나를 품었던 세상, 그녀에게 도착했다. 설명할 수 없는 원죄가 그곳에 고여 있었다.
그날 내가 어떤 변명을 늘어놓았는지는 이제 희미하다. 다만 젖은 옷가지가 어깨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감각만은 선명하다. 하산하는 길에 화해도, 다짐도 없었다. 그날 이후 그녀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법을 잊었다. 솔직한 내 모습이 그녀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을 것 같아, 나는 입을 닫는 쪽을 택했다.
때로는 세상을 다 짊어진 듯한 그녀의 자발적 희생이 가혹한 폭력처럼 느껴졌다. 사랑이 메마른 자리에는 악에 받친 의무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수고를 짊어진 그녀 곁에서 아버지는 부성을 잃은 채 돌봄의 객체가 되었고, 나는 해결해야 할 짐으로 전락했다. 희생하는 그녀를 미워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거대한 죄책감이 되었다.
내가 밖에서 실패하고 돌아올 때면 그녀는 나보다 더 처절하게 무너졌다. 나는 내 슬픔을 온전히 누릴 기회조차 뺏긴 채, 굳게 닫힌 그녀의 방문 앞을 서성여야 했다. 방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낮고 긴 한숨은 나를 깨우는 잔인한 알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멀리 어긋난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제 나는 그 시절 그녀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 그러나 여전히 생의 문턱에선 서툴기만 하다. 아마도 그때 나는 폭풍우 치는 한여름의 한복판에 있었고, 그녀는 서둘러 시린 겨울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계절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녀가 무너지지 않는 나의 성벽이자, 온전한 안식처이길 갈구했다. 하지만 꿋꿋하게 버티던 그녀 역시 실은 내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싶었음을 이제야 안다. 사실은 나 역시,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함께 목놓아 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