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을 많이 먹으면 키가 큰다고 하던데, 그런 이유로 우리 집 밥상에 콩나물이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특급 요리는 콩나물 김칫국이었고, 특별한 날엔 콩나물비빔밥,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콩나물국, 추운 겨울에는 뜨끈한 콩나물국밥으로 계절을 보냈다. 전라북도 전주라는 지역색을 고려하더라도, 그녀의 콩나물 사랑은 유별났다. 커가면서 눈치껏 알게 된 사실이지만, 콩나물은 가장 저렴한 식재료였다.
집에서 독립해 서울에 올라온 지 24년이 지났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길어진 지금도, 그녀가 우리 집에 다녀간 날에는 어김없이 큰 반찬 통에 콩나물국이 담겨있다. 그건 며칠을 애써 먹어도 다 못 먹을 양이다. 콩나물국은 분명 냉장고 한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다가, 불현듯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콩나물국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하며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쓸 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콩나물국을 끓여놓을 것이고, 나는 말리지 않을 것이다. 그건 콩나물처럼 가늘고도 질긴, 우리 모녀의 관계 같았다.
꽤 오래전 일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신혼집에 올라오던 날이었다. 항상 딸들만 바라보며 악착같은 고생을 자처한 그녀가 보상받는 기분이 들 만큼 괜찮은 가정을 꾸려서 행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그래야만 그녀의 서러운 인생이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양가에서 손 벌릴 수 없는 상황에서 텅 빈 우리의 통장 있었다. 결국, 고민 끝에 오피스텔 월세 집에 살면서 전세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 거짓말이 불편해 어떻게 해서든 전세로 이사 가려고 아등바등했고, 그럴수록 그녀와의 관계는 더 불편해졌다. 거짓말은 내가 했는데, 피해자가 된 것처럼 부끄럽고 무거운 마음이 나를 짓눌렀다.
그녀가 신혼집에 처음 오던 날이었다. 부족한 살림을 들키고 싶지 않아 닦고 또 닦고 번듯한 식기들로 찬장을 채웠지만, 만지면 만질수록 포장지가 벗겨져 모난 부분들이 튀어나왔다. 싼 가구도 눈에 밟혔겠지만, 무엇보다 거슬렸던 건 내 요리였다. 당시에는 밀키트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인터넷 레시피를 참고해 공을 들여 갈비찜과 콩나물국을 완성했다. 화근은 그 콩나물국이었다. 맛의 비결이라는 멸치육수를 우려내고 콩나물을 푹푹 삶았는데, 하필 멸치의 비린 맛까지 함께 우러났다. 콩나물 전문가인 그녀가 그걸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어떻게 콩나물국에 멸치를 넣을 생각을 해~ 못 먹겠네. 주방에서 나와봐.
그녀는 나를 밀어내고 주방의 주인처럼 요리를 시작했다. 아. 나와 그녀를 멀어지게 했던 건, 늘 이런 순간들이었다. 그녀는 타인의 실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콩나물국에 멸치를 다음에 넣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당부하면 될 일을 늘 주도해서, 다시 만들고, 고치려 했다.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삐딱해졌고 뾰족한 말들을 꺼내 놓고는 후회한다.
그 이후로 콩나물국을 끓이는 순간마다 그때로 돌아가 목에 걸린다. 그날 나를 힘들게 한 건 그녀의 태도였을까? 거짓말로 예민해진 내 감정이었을까? 무엇이든 버거웠다. 아직도 멸치 양이 적당했는지, 정말 과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민낯이 드러났던 것뿐인지도.
그렇게 지겹도록 먹은 콩나물인데, 나는 아직도 콩나물을 좋아한다. 아이를 가졌을 때, 입덧으로 뒤집힌 속을 콩나물국밥으로 달랬고, 지칠 만큼 힘들 때면 콩나물 김치를 끓여 먹는다. 이젠 좋은 추억도 있지만, 씁쓸한 기억도 함께 담겨있는 기다란 나물을 입에 넣고 씹으면, 길고 긴 기억들이 씹힌다. 콩나물은 여전히 아삭했고, 기억은 여전히 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