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

나의 삶

by 제이맘

며칠 전 친한 대학친구로부터 유펜에서 일년동안 포닥과정을 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이 친구는 사학을 공부하면서 한국에서 석사를 마친 후 UC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일년여 모교 강사생활을 하다 한국의 대학 시스템에 염증을 느꼈는지 다시 미국에 있는 주립대로 돌아가 강의를 하고 있는 친구이다.


대학때부터 참 대단한 친구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국의 좁은 땅덩어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꿈을 펼치는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반면, 난 뭔가...하는 생각이 울컥듬과 동시에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아픈 추억이 떠올랐다.


고시공부를 하기전 2002년 대학교 3학년때쯤


친오빠의 권유로 당시 한 통신사에서 주관하던 대학생 해외 인터쉽 프로그램에 응시한적이 있다.


1회때 응시하여 한달동안 시드니 대학에서 연수를 받고왔던 친오빠가 당시 연애하느라 취업준비며 학점관리는 뒷전이던 동생이 딱하고 걱정이 되었는지 한번 지원해보라며 등떠밀어 했다가 얼떨결에 최종면접까지 보게 된거다.


당시 남친은 사시 1차준비 중이었고, 자신의 시험을 앞두고 한달여동안 해외에 나가있어야한다는 이유로 응시하는것도 탐탁치않게 여겨 최종면접을 앞두고도 만나기만 하면 이를 이유로 다퉜다.


그러나 고3때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가 건강상의 이유로 쓰러지시고


내가 대학 입학당시 이미 명예퇴직하셔 매달 생활비 마련으로 과외알바를 쉴수 없던 상황에서 한달여의 무료 해외연수 포상은 포기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미국 아이비리그인 유펜에서 한달 머물수 있다는 생각에 최종면접에 합격한 것도 아니면서 면접준비하는 동안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기에 당시 남친의 방해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못했다.


그러나


결국 난 최종면접에 불합격하고 같이 최종면접을 봤던 같은 과 한학년 위 여선배가 합격자 명단에 올라 유펜에 가게 되었다.


면접 당시 군가산점 제도의 위헌여부가 논란이 되었던지 면접관이 면접자들에게 그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다.


사시 공부도 하기 전이라 그러한 판례가 있는지 조차도 몰랐고,


평소 관심있던 주제는 아니라 머라 답변해야할지 조금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 언니가 먼저 군가산점 제도는 유지되어야한다는 취지의 발언과 함께 군대 다녀온 남자가 그러한 특혜를 받아 취업한다고 하더라고 결국 배우자가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니냐는 내용으로 답변을 한거다.


이를 듣고 종전에 사회학 수업을 들으며 들은 풍월은 있었고 나는 토론의 묘미를 위해, 상대의 근거에 반박하는 내용으로 폐지주장을 펼치며 현대사회에서는 가정이라는 형태가 다양화되고 있으며, 남성이라도 장애가 있어 군대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군필자에게만 취업에 있어 특혜를 주는건 부당하다는 답변을 정답이라 생각하고 자신있게 말하였다.


면접을 끝내고도 나는 내가 당연히 합격할거라 생각했다.


평소 강력한 소신이 있어 그러한 대답을 한건 아니지만,


그 언니가 답한 것보다는 내가 한 답변이 더 정답에 근접한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언니의 답변이 면접관이 원하던 답변이었다는 것을 깨달은건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였다.


불합격의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대학 3학년을 마친뒤 무작정 휴학을 하고, 자비로 참가하는 호주에서의 두달 환경자원봉사 프로그램을 떠났다.


평소 환경에 대한 소신이 있어 프로그램에 참여한건 아니고 내가 알바를 하며 마련할수 있는 금액에서 경험할수 있는 유일한 해외연수 프로그램이었기에 무조건 대학 졸업 전 해외는 나가야지하는 생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당시 남친은 내가 최종면접에 불합격하고 안도하던 중 자신의 1차 시험기간 전후로 두달동안 해외에 간다는 나에 대해서 극도로 불만을 표시했다.


나는 오히려 시험을 앞두고 내가 있으면 방해가 될테니 나가있겠다며 남친을 달래고 홀연히 호주로 향했다.


이후 행복한 두달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토익공부를 시작하며 취업 준비를 하려던 중 사시 1차에 합격한 남친이 나에게 사시를 준비해보라고 권했다.


당시 한자도 제대로 몰라 법서도 읽지 못하는 내가 무슨 사시공부냐고 거절했지만


사시공부 어렵지 않다고 자신이 옆에서 알려줄테니 해보라며 나를 부추긴 것이다.


낮은 학점으로 높은 취업의 난관도 쉽지 않았던 나는 결국 남친의 꼬드김에 못이겨 사시를 준비했다.


시험을 앞두고도 나랑 연애한다고 맨날 노는것처럼 보이던 남친이 내가 호주 가있는 두달동안 바짝 공부해 1차에 합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사시 공부를 쉽게 보기도 한거다.


그러나 아마도 당시 남친은 2차준비를 해야했기에 여자친구두고 혼자서 공부하기도 싫었을테고,


집에서는 장래가 촉망되는 아들이 2차 앞두고 연애질한다기에 나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어 이를 상쇄하고자 나를 사시공부에 꼬드긴 것 같았다.


그런데 뜬구름잡던 사회학 공부와 달리 뭔가 논리정연하고 답이 명확해 보였던 법학(어쨌든 당시 나에게 사시 1차는 객관식 문제에서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처럼 보였으니)은 새롭고 흥미롭기도 하였다.


이후 그 남친과는 재시를 앞둔 상황에서


내가 처음으로 응시한 사시 1차를 불합격하고 내년 사시 1차 응시를 위해 토익시험을 보기 전날 일방적 이별 통보를 받고 헤어졌다.


처음에는 일방적 통보가 납득하기 어려웠고,


지만 믿고 덜컥 들인 사시의 늪에서 이미 빠져나오기에는 애매한 상황인데 나는 어쩌라는것인지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별의 이유가 내가 전라도 출신의 보잘것 없는 집안의 딸이었기에 재시를 앞둔 자신의 잘난 아드님의 발목을 잡을거라는 부모의 강력한 반대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미련없이 남친을 놔주고 독하게 사시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힘든 시험준비기간을 견딜수 있었던 건 법학에 대한 소신이나 그런 것이 아닌, 한마디로 오기였다.


이후 운좋게 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소신을 갖고 사시준비했던 많은 연수생들, 선배 법조인들의 행적을 보면서 나는 소신없이 사시를 보게된 나의 행동이 부끄럽고 초라해보였다.


법에 대한 고민과 법조인이 되어 무얼하고자 하는 열망없이 우연히 얻은 나의 합격이라는 결과가


열정을 가지고 법학에 매달린 다른 누군가의 소신을 짓밟은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연수원 2년의 과정은 그러한 고민을 그제서라도 할수 있기에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과제와 진도의 홍수속에 밀려 내공없이 덜컥 합격한 나는 연수원 과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허우적대기에 바빴다.


이후 어중간한 연수원 성적과 문닫고 들어간 사시성적을 합산하니 임관권에는 축에도 못들었기에 다시 연수원 수료 후 취업이라는 문턱 앞에 오게 되었다.


당시 로펌에 낼 자소서를 쓰며 취업의 난관을 헤매던 중 여자라는 이유로 나보다 연수원 성적 안좋은 남연수생들에게 면접의 기회가 밀리며 씁쓸함을 느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라는 난관에서 도망치고자 준비했던 사시의 끝이 또다시 취업이라니.


당시에는 소신이 아닌, 여연수생에게 공공기관 이외는 받아줄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공고가 올라오는 공공기관에 모조리 지원서를 제출하였고, 운좋게 지금의 회사에 합격하여 이제는 10년차 변호사가 되었다.


2009년 면접당시 한 면접관으로부터 당시 촛불집회에 투입되는 공권력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질문을 받았고,


나는 소신보다는 당연히 법조인으로서 가져야할 리걸마인드에 근거해 면접관이 원하는 정답이라 생각하며 합법적으로 허용된 공권력인만큼 법적인 절차하에 최소한의 행사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금 상황은 그러지못하는 것 같다는 취지로 답변하였다.


그런데 합격이후 당시 면접에 참여하셨던 선배 변호사님으로부터 나에게 질문을 했던 면접관은 촛불집회에 부정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소신을 가지고 했던 답변이 아니라, 면접관이 원하는 정답이라 생각하며 했던 답변 덕분에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었던걸까.


나는 진짜 그러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나하는 반문을 갖으며 어찌어찌 일은 시작하게 되었고,


어느덧 넘쳐나는 사건과 서면 속에 그런 고민은 타성에 젖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고 반복적으로 사건을 쳐내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 흘러온 10년째 해


쉬고싶다는 생각도 간절해오던 참 둘째가 생기고 잠깐 쉴수 있는 여유가 생기어 돌아보게 된다.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걸까.


남들이 가는 길이라고 소신없이, 생각없이 혹여 휩쓸려가고 있는건 아닐까.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나.


내가 소신없이 했던 행동들에 누군가 응답해주었다면


혹여 그가 나에게 준 사명이 있었다면,


난 그걸 못본척 놓치고 있거나 외면해왔던건 아니었을까.


무언가 소신있게,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길은 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든다.


내가 갖지 못한 무언가를 놓치지 않은듯 해서


지금이라도 그걸 찾기에는 너무 늦어버린건 아니겠지.


종현이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걷던 길을 멈추고 다시 호흡을 다듬고, 찾아보자.


----------------------------------------------------------------------------


위 글은 내가 2018. 4. 26.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이제는 10년차가 아닌 17년차 변호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여전히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찾지 못하고 있다.


회사 연차가 쌓인다고 퇴사에 대한 고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이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달고 살고 있다.

가끔은 변호사업이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감성형인 내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업무를 해야 할때는 가끔은 힘에 벅차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이일을 그만두고 하고싶은 일이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삶이 힘들고 괴로운 것 같다.


삶의 낙이 없다고 해야 할까.

매일 쳇바퀴 돌듯 돌아오는 하루가 선물이 아니라 형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마흔 중반의 나이대가 그런 것 같다.

일하랴, 애들 키우랴, 살림하랴.

정작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부족하니 삶의 만족도가 떨어지고 힘에 부칠때가 있다.

꾸역꾸역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될 때가 있다.

언제쯤이면 그런 고민이 해결되는 시기가 올까.

작가의 이전글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