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수고로 우리는 살아간다
2016년 9월 6일, 제품 옆면에 내가 적어둔 날짜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만 9년 전, LG 통돌이 14kg짜리 세탁기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당시 아이들은 중고등학생이었고, 네 식구의 빨래는 매일 쏟아졌다. 얇은 여름 티셔츠부터 두툼한 겨울 이불까지크고 작은 빨래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처리해줬다. 거의 매일, 쉬는 날도 없이 그랬다. 돌이켜보면 고장이 안 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띠,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그날도 평소처럼 빨래가 끝났다는 소리에 세탁기 앞으로 갔다. 뚜껑을 열고 검은 운동복 상의를 꺼내는 순간, 손끝에 묵직한 감촉이 전해졌다. 이상하다 싶어 다른 옷가지도 만져봤다. 가볍고 뽀송해야 할 빨래들이 물기를 가득 머금고 축축했다. 탈수가 제대로 안 된 것이다. 순간적으로 빨래가 한쪽으로 쏠렸겠거니 하고 통 가장자리로 옷들을 고르게 배치했다. 뚜껑을 덮고 탈수 버튼을 눌렀다.
세탁기는 조용히,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통이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며 중심을 잡는 듯했지만, 곧 빨래가 다시 한쪽으로 쏠리며 멈춰 섰다. 삐, 삐, 삐 경고음이 울렸다. 또다시 옷을 꺼내 하나씩 정리해서 통 안에 넣고 탈수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이번엔 간단 코스 말고 표준 코스로 설정하고 세탁을 다시 시작했다.
한참 뒤 다시 울려 퍼진 완료 알림음. 이번엔 제대로 되기를 바라며 뚜껑을 열었지만, 기대는 무너졌다. 축축한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빨래는 여전히 무거웠고, 물기는 그대로였다. 이쯤 되니 고장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야를 들고 와 빨래를 하나하나 옮겼다. 젖은 빨래가 물을 뚝뚝 흘리며 대야를 채워갔다. 앞 베란다로 옮겨가 두 손으로 빨래를 꽉 짰다. 물기가 손바닥 사이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손으로 빨래를 짜보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동안 손빨래를 해도 마지막 단계는 언제나 세탁기의 몫이었다. 탈수까지 끝난 가벼운 빨래는 툭툭 털기만 하면 널 수 있었으니까.
빨래를 짜고 널며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우리는 빨래를 손으로 했다. 양동이에 물을 받고 비누칠을 해가며 손으로 치대고, 빨래판에 문질러 거품을 냈다. 물을 받아 몇 번이고 헹군 뒤, 두 손으로 돌돌 말아 쥐어짜고, 옥상에 올라가 빨래를 널었다. 빨랫줄에 걸린 옷들은 하루 종일 햇빛에 바짝 마르고, 저녁이 되면 옥상에 다시 올라가 그 따뜻한 빨래들을 걷어 품에 안고 내려왔다.
지금처럼 버튼 하나로 끝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 시절의 빨래는 시간과 정성, 그리고 노동이 함께 들어간 일이었다.
다음 날도 같은 증상이 반복됐다. 탈수가 되지 않는 세탁기와 씨름하다 결국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1588로 시작하는 대표번호로 걸자, 익숙한 자동응답 안내가 나왔다. 인공지능 상담원이 시키는 대로 하나하나 입력하며 진행해야 했다. 결국엔 회원 가입도 해야 했고, 제품 등록도 필요했다. 몇 번의 단계를 거친 뒤에야 겨우 방문 접수를 마칠 수 있었다.
한참 후 서비스 기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세탁기 상태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한참을 설명하고 나니, 기사 말은 이랬다. “오래 사용한 기계에서 종종 발생하는 증상입니다. 아마 바닥 원판의 축이 손상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수리하려면 비용이 꽤 들 거예요. 거의 새 제품 가격의 절반 정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휴대폰 액정 깨졌을 때 바꾸기 보다 그냥 사는 것이 낫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새로 사기로 했다. 기능은 똑같지만 용량만 조금 큰, 같은 회사 제품을 주문했다.
요즘은 건조까지 해주는 고급 세탁기들이 많다하지만 별로 관심이 없다. 지금껏 함께했던 것과 비슷한 기종이면 충분했다.
생각해보면 세탁기 하나에 새삼스럽게 정이 들 줄은 몰랐다. 그동안 얼마나 혹사했는지 떠올리니 미안하기까지 할 지경이다. 운동 후 땀이 밴 반팔 티 하나도, 간단한 속옷 몇 벌도 손빨래 대신 세탁기에 맡겼다. 그냥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해주니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 기계는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고장 없이 묵묵히, 매일 같은 자리를 지켰다. 우리 가족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을 해냈다. 눈에 띄진 않지만 없으면 곤란한 존재. 그게 이 세탁기였다.
세탁기를 내보내며 문득 생각했다. 우리 삶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말없이 묵묵히, 늘 제자리에 있어주는 사람.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동료일 수도 있다. 고장 날 때까지 애써주고도 알아주지 않으면 조용히 사라지는 존재들. 그들 덕분에 우리가 오늘도 잘 살아내는 것이다.
세탁기야,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고장 날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우리 곁을 지켜줘서. 수고 많았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