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5편
한겨레출판에서 집필한 이 책 <조지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이 영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시작한 1931년부터 작가 생활의 말년이었던 1948년까지 집필한 여러 편의 에세이 중 그의 철학이 드러나는 대표작 29개를 엮은 에세이집입니다. 연도순으로 나열된 여러 에세이를 읽어가면서, 독자들은 조지 오웰의 삶과 철학, 문학관과 작가관, 그가 시대에 가졌던 문제의식 등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조지 오웰의 작가 소개 글에서도 이미 설명했듯이, 조지 오웰의 글과 철학은 ‘압제적인 정치 권력과 억압받는 피지배자’, ‘격정적인 시대 속에서의 작가와 문학의 역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지신의 글에 분명한 정치적 의식을 담고자 했으며, 사회에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번 에세이 작품에서 살펴볼 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지배층이 권력 유지를 위해 선택하는 전략 (2) 사회 하층민, 피지배 계층의 우울한 생활상에 대한 이해
(3) 스페인 내전의 참전 경험과 노동자 혁명의 한계 (4)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주의의 역할
(5) 억압받는 시대 속에서 문학과 작가의 역할과 책임
이번 연재글에서는 책에 담긴 29편의 에세이를 전부 다루고자 합니다. 각 작품의 핵심 문장과 메시지를 전달하며, 독자분들이 조지 오웰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드리고자 합니다. 각 10편의 에세이씩 총 3편의 글을 연재할 생각이며, 독후감 3편에서 다룰 작품은 1946년 작 ‘두꺼비 단상’부터 1949년 작 ‘간디에 대한 소견’까지입니다.
■ 21. 두꺼비 단상(1946) : 자연을 예찬하고자 했던 오웰의 자연관
“우리가 딱히 아프거나, 배고프거나, 공포에 떨고 있거나, 감옥 또는 행락지에 갇혀 잇지 않는 한, 봄은 여전히 봄인 것이다. 공장엔 원자탄이 쌓여가고, 도시엔 경찰이 어슬렁거리고, 확성기엔 거짓말이 넘쳐흐른다 해도, 지구는 여전히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아무리 못마땅한들, 독재자도 관료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에세이 <두꺼비 단상>은 오웰이 남긴 여러 에세이 중 자연에 대한 찬미가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두꺼비와 다양한 봄의 풍경을 묘사하며 오웰이 느끼는 봄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 찬미는 자연스레 기계와 공장이 지배하는 당대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오웰은 자신의 시대에는 자연을 사랑하는 태도가 비판받음을 지적하는데,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태도가 사람들을 게으른 존재로 만들며, 기계 문명의 발전을 퇴화시키는 일이라고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웰은 분명히 우리에게는 자연으로 가득한 삶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그 중요성에 대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철과 콘크리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이 퍼진다면, 사람들은 증오와 지도자 숭배 외에는 다른 에너지 배출구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얻는 즐거움이 모두 사라져버린다면,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조지 오웰은 자연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환희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것이며, 갈등과 파괴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가장 되찾아야 하는 가치임을 전달합니다. 글의 마지막에선 세계 곳곳에서 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폭력과 전쟁이 계속 되더라도 결국 봄이 찾아온다는,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금 예찬합니다. 우리에게는 작가와 문학 외에도 또 다른 무기가 있으며,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커다란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22. 어느 서평자의 고백(1946) : 대부분의 글과 서평은 무의미하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다.”
오웰은 그의 삶 속에서 소설과 르포 외에도 엄청난 양의 에세이, 칼럼, 서평을 남겼던 작가입니다. 특히 서평을 쓰는 일은 그의 생업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소양을 쌓는 큰 자양분이 되었다는 점에서 서평에 대한 그의 생각을 풀어낸 이 에세이를 읽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그가 지적하는 부분은 서평을 쓰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거짓된 것인지 느끼는 그의 회의감입니다. 핵심은 우리의 인식과 달리 좋은 책이라고 불릴만한 것은 얼마 없으며, 심지어 모든 책이 서평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무리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책은 형편없고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서평가로서 그가 하는 일은 단지 독자들의 감흥을 불러일으켜 책을 더 많이 판매하기 위해,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을 그럴싸하게 조합하는 일이 전부입니다.
글의 표면은 서평 작업의 무의미함을 묘사하고 있지만, 아마 그가 전달하고 싶었던 핵심은 의미있는 책이 얼마 없다는 비판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의 여러 에세이를 살펴보면서, 오웰이 추구했던 글과 문학의 목적은 사회적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에 있으며, 작가는 더 이상 순수한 존재가 아닌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대항의 최전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서평가로서 읽은 대다수의 책은 어떠한 울림이나 메시지도 전달해주지 못하는 그저그런 글이 전부였기에, 그는 당시 문학계에 대한 깊은 실망감과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입니다.
■ 23. 나는 왜 쓰는가(1946) :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는 책의 제목이자 오웰의 작가관, 문학관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그는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를 크게 4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합니다. 1) 똑똑해보이고 싶거나, 유명해지고 싶거나, 복수를 하는 등 개인적인 이유에 비롯된 ‘순전한 이기심’, 2) 세계, 언어, 소리 등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것을 타인과 나누고자 하는 ‘미학적 열정’ 3)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낸 뒤 후세를 위해 그것을 보존하려는 ‘역사적 충동’, 4) 세상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그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오웰이 특히 강조하려는 부분은 그가 살던 격동의 시대에서는 글쓰기의 정치적 목적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작가는 작가가 살고 있는 시대에 따라 글의 주제를 결정하고, 작가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회와 여러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정서적 태도를 갖추게 됩니다. 따라서 작가는 절대 시대 분위기와 온전히 분리되어 ‘순수한 문학’을 쓸 수 없으며, 오웰이 살던 격동의 시대에는 더더욱 사회와 분리되어 독립된 존재로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에 대해 오웰은 자신의 문학 활동을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라고 표현하며, 스스로 느끼는 문제 의식과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에 궁극적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글은 의미없이 형식적이고 장식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회고하며, 정치적 목적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 다시금 표현합니다.
물론 오웰이 주장하는 바가 언제, 어디서나 작가가 정치적 목적을 최우선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도 앞서 언급한 다양한 동기에 의해 글을 쓰고, 순전히 개인적인 이기심과 흥미를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문학에서도 이와 같은 목적이 최우선이 되지 않아도 무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에세이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작가와 그가 쓰는 글은 결코 시대상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작가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갖게 되는 정체성이 강하게 발현되며, 그의 삶과 사고방식 모든 곳에 사회상이 투영됩니다. 따라서, 작가에게는 이를 반영하여 글을 완성해야 할 책임감이 있고, 우리 독자들은 글을 읽을 때 텍스트 너머의 세상을 충분히 이해해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 24. 정치 대 문학 -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1946) : 스위프트에 대한 오웰의 인식
“미적인 판단은 정치적이거나 도덕적인 의견 차이 때문에 마찬가지로 극심하게 뒤바뀔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즉, 즐거움이 견해차를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 스위프트는 물론 옳지도 않고 사실 제정신도 아니었지만 좋은 작품이긴 했다는 익숙한 답으로 충분하지 않다. 어떤 책의 문학적 질은 다소간은 주제와 분리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이 에세이에서 조지 오웰은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글의 전반부에서는 걸리버 여행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스위프트가 비판하고자 하는 영국 사회의 문제점과 인간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스위프트는 실용적인 목적에 쓰이지 않는 문학은 무용하며, 지적인 호기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뚜렷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과학이나 정치 등 논리적 추론을 이끌어내는 힘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지적 호기심이 결여되고, 대부분의 문맥에 대한 상식을 지니고 있는 정적인 형태의 문명을 긍정합니다. 그가 나름의 이상국가로 설정해놓은 휴이넘인의 세상을 살펴보면, 이성의 가치를 부정하고 직관적 확신을 바탕으로 한 사회가 건설되어 있습니다. 단, 전체주의적 사회에 대해서도 비판한 듯 보이는데, 올바른 법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채 운영되는 국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드러납니다.
오웰은 스위프트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가 일생을 우울한 감정에 빠져 살았고, 인생을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음을 지적합니다. 스위프트는 지나치게 부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데에만 집중하였고, 이상 사회에 대한 제시보다는 현 사회에 대한 비판과 모욕을 위해 <걸리버 여행기>를 썼을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가 바라보는 인간은 오로지 나약함과 악취로만 묘사되고, 밝은 미래라는 관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지상 낙원은 이상적이고 긍정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거짓, 우매, 쾌락, 사랑, 불결 등)이 모두 제거된 정적인 상태 그 자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처럼 오웰은 분명히 스위프트의 사상과 세계관에 반대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걸리버 여행기>라는 작품을 인생에 손꼽는 작품으로 고르며,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과 작품을 즐기는 것은 분명히 별개임을 강조합니다. 독자들이 작품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 메시지로 인해 예술성에 대한 체감이 변화할 수도 있고, 예술성에 대한 감상으로 인해 메시지에 대한 판단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작품을 인식함에 있어서 둘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 25.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1946) : 가난한 이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비참하다.
“나는 곧 펼쳐질 광경을 미리 본 듯했다. 딸이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으면 노인이 딸의 머리에 손을 얹고서 죽어가는 자로서 축복을 내리는 장면 말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소변통을 쓱 내밀 뿐이었고, 딸은 당장 그것을 받아들고서 용기에다 비워버리는 것이었다.”
오웰이 버마에서의 경찰 생활을 마무리하고 파리와 런던의 하층 생활을 경험하던 1929년, 그는 폐렴에 걸려 가난한 사람들만 입원하는 파리의 한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질병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그들이 최후의 수난까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대우받는지를 직접 목격합니다. 그들을 대하는 의사와 학생들은 하나의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 본인들의 수련을 위한 교보재 정도로만 여기며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최후의 순간에도 그저 본인의 자리에서 쓸쓸히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간호사들은 어떠한 슬픔도 없이 기계적으로 그들의 주검과 자리를 씻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환자를 눕힐 뿐입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광경은 오웰에게 가난한 밑바닥층의 인생은 최후의 순간까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강렬하게 전달해주었습니다.
그들의 가족은 물론, 환자 스스로도 자신의 삶에 어떠한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다가오는 죽음을 무방비하게 맞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뿐입니다. 오웰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상에 대해 수도 없이 이야기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가난한 자들이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는 광경보다 참혹하지 않다고 말하며, 그들의 비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들을 위한 병원은 치유의 공간이 아닌, 폐쇄와 격리를 위한 지하 감옥에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오로지 죽음을 고통스럽게 기다리는 곳이었으며, 자신의 삶이 빨리 마감되기를 바라는 정리의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오웰이 살던 시기에도 여전히 질병과 고통은 가난함을 기준으로 더 가혹하게 적용되었으며, 그들의 체념적 태도를 더욱 높여 삶을 온전히 포기하게 만드는 잔인한 운명이 되었습니다.
■ 26.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1947) : 종교와 인본주의의 화해 불가능한 갈등
“인본주의자와 신앙인 사이에 휴전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는 듯하지만, 두 입장은 사실 화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세상 아니면 저 세상을 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이 세상을 택하게 되어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상하리만치 그의 삶에서 매우 거센 태도로 세계적인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비판하였고, 심지어 셰익스피어가 평균적인 작가조차 되지 못하는, 전혀 독창적이지 않고 저급하며 부도덕한 인간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오웰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톨스토이의 공격적 태도에 대해 분석하며, 본질적으로 그것은 종교적 인간과 인본주의자 사이의 해결할 수 없는 대립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톨스토이는 대표적인 기독교적 인간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가장 궁극적인 행복입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인간은 기꺼이 현재 삶에 주어진 쾌락과 야심을 얼마든지 포기하고, 남을 위해 배푸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관에 지나치게 몰입한 톨스토이는 스스로의 행복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타인을 공격하면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관철시키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강조한 인본주의는 본질적으로 톨스토이의 기독교주의와 타협할 수 없는 것인데, 죽음 이후의 구원을 찾는 기독교주의자들에 비해 인본주의자들은 삶 그자체를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삶은 끊임없는 투쟁의 과정이지만, 그들은 현재 주어진 인간의 삶에서 가치를 느끼는 것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여기고 살아갈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지향점에 따라, 기독교적 신념과 인본주의 사이에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아마 톨스토이는 자신의 가치관을 많은 이들에게 관철시키고자 꾸준히 사랑받아 온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웰은 둘 사이의 갈등에 대해 셰익스피어의 손을 들어주며, 궁극적으로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은 오직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았느냐에 있음을 역설합니다. 톨스토이는 우리의 예술은 인류의 삶에 중요한 주제를 다루어야 하고, 작가가 진정으로 느끼는 바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웰은 이러한 예술관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용어에 의존할 뿐이며,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오래 살아 남은 것은 곧 시대의 정신을 잘 반영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자의적인 해석으로 본인의 가치관만을 주장하고자 했던 톨스토이와 달리,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오래 살아남으며’ 그 가치를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분명히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인류사에 앞으로도 전승될 필요가 있으며, 톨스토이의 지적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27. 정말, 정말 좋았지(1947) : 피지배자로 존재해야 했던 오웰의 유년시절
“학교생활 돌아가는 게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미덕은 이기는 데 있었다. 즉, 미덕이란 남들보다 더 크고, 강하고, 잘생기고, 부유하고, 인기 좋고, 세련되고, 거리낌 없는 데 있었
다. 삶이란 본래 위아래가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자체가 옳은 일이었다. 강자가 있어 그들은 이겨 마땅하고 언제나 이겼으며, 약자가 있어 그들은 져 마땅하고 언제나 끝없이 지기만 했다.”
이 작품은 조지 오웰이 8살이던 1911년부터 1916년까지 다녔던 학교에서 경험한 권력의 불편한 속성을 회고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재주는 있는 중위계급 아이’였던 오웰은 어려서부터 계층에 의해 나누어지는 사회적 관계를 경험하였고, 특히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서 느껴야만 하는 패배주의에 끊임없이 고통받았습니다. 아이의 성장을 위한 스승이 되어야 할 선생들은 낮은 계층의 아이들이 가진 모든 희망을 박탈해버리고, 이미 사회적으로 패배한 존재로 그들 스스로를 규정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학교의 유일한 정의로움은 약육강식의 법칙에 존재하여, 오직 강한 상류층의 아이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아래에 위치한 아이들은 끝없이 패배하며 자라야 했습니다.
오웰은 자신의 학교 생활에서 얻었던 확신은 오직 ‘실패’에 있었다고 서술하며, 불이익을 이겨낼 수 없었던 어린 아이가 감수해야만 했던 불평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힘이 없는 어린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주어진 상황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고, 분에 맞는 행동과 사고로 자신을 제한하는 것 뿐입니다. 아동기의 오웰은 분명히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주위 사람들의 태도와 학교 생활이 비극적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의 탈출구를 찾기 보다는 다가오는 한계 속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글의 말미에서 이러한 종류의 문제는 가장 계몽된 학교를 비롯한 영국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오웰은 유년기부터 사회적 계층과 불평등을 몸소 겪으며 지배 관계의 잔인함과 하위 계층의 비극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 28. 작가와 리바이어던(1948) : 정치적 충심과 문학적 충심을 선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나는 다만 지금 우리가 정치적 충심과 문학적 충심 사이에 그어 둔 선을 보다 선명하게 긋자는 것이다. 작가가 정치에 관여할 때는 일반 시민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관여해야지 작가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
‘리바이어던’은 성서에 나오는 바다 괴물로, 영국의 사회계약론자 토마스 홉스가 절대 권력을 비유하기 위해 사용하며 강력한 정치적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웰은 국가가 거대 권력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정치적 시대 속에서 작가가 어떠한 태도와 사상을 가져야 할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에세이에 풀어내고 있습니다. 오웰이 살던 시대는 전쟁, 파시즘, 원자폭탄 등 파괴적이고 정치적인 단어가 세상을 지배했으며, 작가들의 주제는 협소해졌습니다. 정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문학을 침범해왔고, 작가들은 순전한 미학적 태도를 포기한 채 당을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작가들은 비문학적 충심에 따라, 작가로서의 상상력이나 감정을 포기하고 정치적 입장만을 따르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순수한 문학을 지켜야만 할까요?
오웰은 작가 역시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치적 충심과 문학적 충심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정치적 행동은 작가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서 해야함을 강조합니다. 즉,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자유롭게 선택하여도 되지만, 글쓰는 행위와 이것을 분명히 구분하여 글이 당파성을 지니지 않도록 만들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또한, 이것은 정치 자체를 절대 언급해선 안 된다는 경고가 아닙니다. 다만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자 한다면, 어디까지나 한 개인으로서 역할해야 하는 것이지, 작가로서의 본분과 이를 혼동하여서는 안됩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자신의 생업과 정치 활동이 뚜렷하게 분리되기 때문에 본연의 자신을 일부분 지킬 수 있지만, 작가에게는 글을 쓰는 정치적 활동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생업과 정치 활동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분명히 작가로서의 자신과 시민으로서의 자신을 분리할 수 있고,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글쓰기 행위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시대 속에서 모든 작가가 추구해야 하는 자세이며, 작가와 문학이 살아남을 수 있는 중요한 해답일 것입니다.
■ 29. 간디에 대한 소견(1948) : 간디의 가르침에 대한 오웰의 비판적 소견
“더욱이 간디가 개별 인간을 대할 때는 그토록 잘 통했던 가정, 즉 모든 인간은 대체로 가까이하기 쉽고 관대
한 제스처에 반응한다는 가정은 진지하게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미치광이를 다룰 때는 반드시 옳은 게 아니다.”
에세이 <간디에 대한 소견>은 시대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도의 지도자 간디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오웰의 소견을 담은 글입니다. 간디는 타고난 담력과 부정직함을 간파하는 시선을 지닌 비범한 인물이었으며, 평화주의적 가치를 통해 인도인을 영국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웰은 간디의 사상은 오직 하느님이 존재하고 구체적인 사물의 세계는 벗어나야 한다는 종교주의적 신념을 기반으로 할때에만 타당함을 지적합니다. 이는 틀스토이와 셰익스피어의 갈등에서 보았던 인본주의와 종교적 갈등 간의 대립과 유사한데, 만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간디의 사상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의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가르침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오웰이 판단하는 인간성의 본질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태도’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신의를 위해서 흔쾌히 죄를 저지르고, 금욕을 포기하고 정욕을 추구하며, 생에 패배하여 부서질 각오를 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에 반해 간디의 이상론은 모든 것에 초월한 성인을 가정하고 있으며, 우리는 인간과 하느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오웰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포기한 채 성인이 되기 보다는 인간적인 삶과 감정을 중시하는 방향을 선택할 것이라 가정합니다.
한편, 간디가 전체주의의 잔인성과 파괴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점 역시 지적하고 있습니다. 간디는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달하고 충격을 줌으로써 평화적인 독립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은 최소한의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에서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헌데, 오웰의 시대에 등장한 수많은 독재 국가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보다 더 잔인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모든 국민을 통제하였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통제하여 사람들은 최소한의 발언권조차 얻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국제적 갈등이 고조되는 시대에 무조건적인 평화주의는 오히려 국가와 평화를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비이성적인 광란이 인간성을 한참이나 넘어선 시대에는 더 이상 평화주의적 접근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