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노래하는 걸그룹이 존재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24명의 멤버 전원이 무대에 올라 군무를 보여주는 걸그룹은? 서울 지하철 2호선을 노래하며 지하철역과 서울의 오랜 복도식 아파트를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삼는 걸그룹은? 기존 걸그룹의 이미지와는 사뭇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는 이 그룹의 이름은 '트리플에스(tripleS)'다. 독특한 콘셉트와 시스템에 중독성 있는 노래로 케이팝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그룹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글 한두 개로는 턱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트리플에스가 만들어가고 있는 Girls' Democracy, '팬주주의'에 집중해 보려 한다.
여기서 '팬주주의'란 이번 글의 가독성을 위해 필자가 직접 창조한 단어로 '팬'과 '민주주의'의 합성어이다. 팬들이 온라인 투표 등의 정형화된 방식으로 아티스트의 향후 행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체제를 뜻한다. '팬주주의' 시스템 하에선 팬들은 단순히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회사와 함께 아티스트를 함께 만들어가는 존재로서 위치한다.
트리플에스의 팬주주의를 이야기하기 전에 케이팝 팬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자. 케이팝은 예로부터 팬들의 과몰입(있어 보이게는, over-commitment)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이들의 열정과 순수한 감정이 아니었다면, 케이팝은 절대 지금의 위치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방시혁, 박진영과 같은 케이팝의 거인들도 인정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팬덤은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렇진 못했다. 팬덤은 언제나 회사에 의해 결정되는 아티스트의 행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팬덤은 팬클럽 또는 팬카페 등의 경로로 소속사와 소통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입장 발표와 해명을 요구하는 선에 그쳤다. 원더걸스 같은 대형 걸그룹이 미국 시장 진출을 명목으로, 일방적으로 국내 가요계에서의 활동 중단을 선언해도 팬덤은 추후에 간담회나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팬주주의 시스템의 기원은 무엇인가. 필자는 2016년 엠넷에서 방영되어 전국민적 인기를 끈 '프로듀스 101'을 꼽고 싶다. 이전에도 아이돌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여럿 존재했지만, '프로듀스 101'만큼의 인기를 구가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프로듀스 101'은 첫 방영 당시의 의문스러운 시선과 부정적 의견을 이겨내곤 단순 히트작을 넘어 히트 시리즈로 도약했다.
케이팝 팬덤을 단순 소비자가 아닌 제작 파트너로서 인정한 결과였다. 우선 '프로듀스 101'은 팬들이 연습생과 양방향 소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팬들이 투표를 통해 응원하는 연습생에게 립밤, 커피차 등의 선물을 제공하면, 선물을 받은 연습생들은 공식 소통 채널을 통해 감사 인사와 인증샷으로 답했다. 이런 간단한 소통에도 팬들은 열광적으로 투표에 참여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에게 투표해 달라는 자발적 선거 운동(?)까지 나섰다. 더 나아가, 11명의 최종 데뷔 멤버를 100% 팬 투표로 선정한다는 프로그램의 콘셉트는 팬들에게 아티스트를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기 효능감을 선사했다. 팬들은 적어도 '프로듀스 101'의 시스템 속에서는 진정 '국민 프로듀서'였다.
그 후, '프로듀스 101' 형식의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결과적으로 케이팝 역사에 특기할 만한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다양한 소속의 연습생들이 출연한 '프로듀스 101'과는 다르게 단일 소속 연습생들이 경쟁하는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전엔 YG만이 이러한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제작해 왔으나 '프로듀스 101' 이후, 엔터사들은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데뷔 전부터 자사 아티스트를 홍보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엔터사들은 방송사와 손을 잡고, 'SIXTEEN', 'I-LAND', '알유넥스트' 등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 결과, 아티스트는 데뷔 전부터 팬들과 소통하며 팬과의 소통에 익숙한 '팬 네이티브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한 팬덤 참여의 일반화가 팬주주의 성장의 큰 흐름이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한 바탕에는 새로이 등장한 팬덤 플랫폼이 있었다. 2010년대 후반, 엔터사들은 플랫폼 회사로의 성장 가능성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플랫폼 기업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하이브는 '위버스'를, SM과 JYP는 합작하여 '버블'을 잇따라 내놓았고, 팬 커뮤니티 플랫폼 서비스라는 신시장을 개척했다.
팬덤 플랫폼의 등장으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팬들의 정보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공식 상품 구매, 자체 콘텐츠 시청과 같은 팬 활동이 팬덤 플랫폼 하로 일원화되면서 이제 팬들은 여러 군데 찾아볼 필요 없이 팬덤 플랫폼에 접속하기만 하면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더불어, 가장 사랑받는 서비스 중 하나인 프라이빗 채팅 서비스로 아티스트와 팬덤 간의 일대다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 팬덤 플랫폼에서 더 많은 정보를 간편히 습득한 팬들은 이를 기반으로 아티스트와 직접 소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주주의는 오늘날 케이팝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여전히 케이팝 팬들은 아티스트의 소속사와 팬덤 간의 불통을 호소한다. 우리는 팬들이 엔터사 사옥 앞에 여러 대의 트럭을 보내 회사에 항의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팬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팬주주의의 기원으로 눈을 다시 돌려야 한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는 분명 흥행작이었지만, 방영 당시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의 방송사, 엠넷은 특정 연습생들에게는 확연히 많은 방송 분량을 챙겨주고, 다른 몇몇 연습생들에게는 '악마의 편집'을 가했다. 방송사가 마련한 기울어진 운동장은 시청률 등의 여러 현실적 이유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간과되었다. 그렇게 아티스트도, 팬도, 아티스트의 소속사도 아닌 제삼자의 이익 추구가 팬주주의 시스템의 공정성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팬들은 편집된 영상, 그 뒤에 가려진 진실을 보는 천리안을 키워내야만 했다.
과정만 불공정한 것이 아니라, 결과도 불공정했다. 2019년, '프로듀스 101' 시리즈 전체에서 제작진에 의해 팬 투표 결과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제작진은 출연 연습생의 소속사들로부터 접대를 받고는 이들의 요구 사항에 맞춰 최종 투표 결과를 조작했다. 팬주주의 시스템은 신뢰를 잃었고, '프로듀스 101' 시리즈는 투표 결과조차도 기업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작될 수 있음을 입증한 채 불명예스럽게 끝났다.
팬주주의가 단순히 방송사와 같은 외부의 이해관계자, 또는 아티스트의 소속사에 의해 신뢰를 잃은 것은 아니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 투표 결과를 공정히 반영했음에도 논란이 발생한 경우도 있었는데, '걸스플래닛999 : 소녀대전'과 '방과후설렘'이 바로 그 예시다. 두 방송 모두 시청자 중 특정 집단에 의한 몰표 현상이 두드러졌다. 투표 결과는 향후 아티스트 데뷔 후 수익과 인기를 책임질, 이른바 '코어' 팬의 목소리보다는 표 수가 많은 쪽의 의견을 반영했다. 극단적으로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일부 팬들이 차라리 '프로듀스 101'처럼 결과를 조작하는 편이 낫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니 과정과 결과의 공정성은 팬주주의 시스템 성공의 충분조건보다는 필요조건에 가깝다. 팬주주의 시스템이 신뢰받고 지속 가능해지려면, 1인 1표 식의 민주주의적 방식을 그대로 이식하기보다는 아이돌 산업의 특성을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