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위기 속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
‘남성의 위기’가 대두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힘든데 왜 남성이 힘들다고 하는 것만을 위기라 칭하며 특별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시대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모든 사람에겐 각자 주어진 짐이 있다. 하지만, ‘남성의 위기’에 주목하는 것은 이 현상이 일전에 그 누구도 우려한 적 없던 위기이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는 몇십 년 전부터 계속 그렇게 주의하라고 경고했건만 무시해 왔으니 인류가 달게 받는다 치고, AI로부터의 위기도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SF 소설들을 무시해가며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으니 달게 받아야 한다고 치자.
남성의 위기는 누가 예견했나? 남성 우위적 사회구조를 재생산하지 않는 것은 전 인류가 기꺼이 이뤄내야 할 책무이지만, 누구도 그 과정에서 길 잃은 남성이 대거 양성되리라는 걱정을 내비친 적은 없다. 한두 세대 이전까지 대한민국엔 유교적 남성 우위 문화가 만연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남성이 일종의 열패감을, (사실이든 아니든)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정서를 공유한다.
누군가는 단순히 이를 남성 우위적 사회 구조에서 여태껏 특권을 누리던 남성이 특권을 내려놓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에 불과하다고,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그들의 정서는 성평등에 따라오는 백래시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계급제 사회를 부수고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귀족의 입장도 생각해 줘야 하냐는 논지다.
설사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들 남성의 위기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대상이다. 이미 전 세계의 젊은 남성층의 상당수가 각국의 권위주의 세력에 힘을 불어넣고 있다. 위기는 혼란을 불러오고, 혼란으로 인한 피해는 모두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프랑스 혁명 이래 프랑스에 민주주의가 완전히 자리 잡기까지만 약 100년이 걸렸다. 그 100년 동안 온갖 혼란 속에서 죽어 나간 이들만 몇 명인가? 우리는 이제 더 나은 과정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이 위기, 남성 사회에서 공유되는 이 정서를 전통적 남성상의 빈자리에서 오는 환상통이라 생각한다. 전통적 남성상, 즉 ‘남자다움’이 어떻게든 해체되었고, 이제는 의식적으로 이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려 해도 그러기 힘든 때다. 그럼에도 잃어버린 부위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분명히 어딘가 쑤신다는 생각을 한다. ‘남자란 자고로 ____해야 한다’라는 지문을 앞에 두고 남성들은 이 지문을 거부하지 못한 채 펜을 들고 도대체 이 안에 무슨 말을 적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누군가는 남자다움의 해체를 없던 일로 만든 후 전통적 남성상을 재건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변해버린 사상적 지형 위에 이전과 동일한 구조물을 쌓아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 한국의 남성도 남자다움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탈피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온갖 ‘이론’을 제시하며 이전에는 남자답다고 여긴 가정을 위한 헌신과 생산 활동에 대한 집중을 이제는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는 미련한 행동으로 묘사한다. 끝없이 의심하라 부추기는 사람들로 인해 자기가 봐온 눈앞의 상대방도 믿기 어렵다. 또한 이전의 남성상이 남성에게도 너무 많은 제약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다들 안다. 밥 한 끼 사 먹을 수 있는 돈을 카페에 쓰는 행위는 2000년대까지는 남자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화장품을 이용해 외모를 가꾸는 것 또한 남자다운 행동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그 경계가 무의미해지고 있다. 많은 남성이 경제적 여유와 배우자의 커리어 유지를 위해 맞벌이를 선호하고 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너무 변해버린 걸까? 그렇다기엔 각종 외부 환경도 전통적 남성상이 구현되길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아버지’로서의 남성상은 평생직장이라는 토양에서 그 싹을 틔운다. IMF 당시 많은 아버지들이 직장을 잃고도 양복을 입고 집을 나와 공원이나 PC방을 전전하던 것도 평생 일해야 할 직장을 잃은 것을 도저히 가족 구성원들에게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의적인 이직이라 한들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하겠다고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가 가정의 생계에 큰 리스크를 부담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균 근속연수는 점점 짧아지고, 평생직장은 사실상 실종된 개념이 되었다. 애초에 경제적인 요인이든 사회적인 요인이든 여성의 근로 활동이 보편화된 지금 가정 외부에서 생산 활동을 독점해 가정 내에서 권력을 갖는 ‘아버지’의 트레이드-오프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
동반자로서의 남자다움 또한 존립하기 힘들다.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은 어떨 때는 전형적이며 전통적인 남성상을 요구하다가도, 어떨 때는 그러한 남자다움이 나타나는 순간을 혐오한다고 느껴진다. 무얼 바라는지 알기 어렵다는 인상을 받기 십상이다. (그건 그냥 얼굴이 충분히 잘생기지 않아서 그런 거라는 나쁜 말은 ㄴㄴ)
그렇다면, 이제 전통적 남자다움 너머 우리는 무엇을 꿈꿔야 하는가? 이제는 모두에게 필요한 인간다움, 휴머니티에 대한 충실은 물론이요, 필자는 이젠 소년다움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년다움은 새로이 만들어낸 개념이 아닐뿐더러, 남자다움과 반대되거나, 남자다움보다 열등한 개념도 아니다. 이전에도 지속되어 왔으나 남성의 일생에서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하나의 단계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다. 소년다움의 일부는 유년기 이후에도 존속하여 ‘남자는 나이 먹어도 애다’와 같은 신화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소년’이란, 남자다움의 뜻이 모든 남자의 공통된 특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듯 단순히 모두가 거쳐 가는 시기, 나이대를 뜻하는 소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소년만화’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소년’, 이상화된 개념으로서의 ‘소년’에 가깝다.
그렇다면, 소년다움은 남자다움과 무엇이 다른가? 소년다움의 가장 큰 특징은 방황의 수용에 있다. 기존의 남자다움에 방황이 자리할 곳은 없다. 우직함과 헌신이라는 가치로 가정을 지탱하는 남성에게 방황이란 기피 대상 1순위다. 중년에 접어든 남성에게 흔히 찾아온다는 정체성의 혼란과 심리적 방황을 ‘중년의 위기’라 부르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자식과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에게 어렸을 때부터 이루고자 했던, 그러나 차마 이루지 못한 꿈을 다시 떠올리는 행위는 그 자체로 위기인 것이다.
반면, ‘소년의 위기’, ‘유년기의 위기’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년기엔 방황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방황한다. 남자아이와 성인 남성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아파한다. 하지만, 이를 기피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시기의 모든 순간이 장밋빛이고 긍정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다움의 이상화된 소년은 소년만화 속 소년처럼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단순한 아노미 상황을 넘어 이를 자기 탐색과 성찰의 시간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우리에게 방황을 강요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위기는 중년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찾아온다. 쳇바퀴 돌 듯 살아가야 하는 세상 속에선 앞만 보고 달리면 된다. 하지만, 쳇바퀴조차 없는 세상에선 어디로 가야 할지 도통 알래야 알 수가 없다. 결국 그러한 세상에서 방황은 피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기꺼이 만끽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글을 거의 다 쓰고 보니 소년다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실은 그렇다. 인간은 비루하고 나약한 몸뚱아리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직도 성별에 구애받으며 살아간다. 완전히 인간적이며, 또 완전히 개인적인 삶을 살기엔 우리 사회는 아직 그 틀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언젠가는 바람직한 인간상만이 남아 인류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기를 기대하며 소년다움이라는 가치가 그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