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뭐든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횸흄 Nov 19. 2021

[생각일기]나의 글에 대해 말하자면

독후감을 가르쳐준 적도 없으면서 선생님들은 독후감을 써 내라고 했다. 친구집에서 본 전집에는 책의 맨 뒤 두 쪽으로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이 독후감인가 보다 여기고 그걸 베껴 내곤 했었다. 그런 수준의 글쓰기 실력이니 학창시절 내내 그것으로 눈에 띈다거나 상을 받거나 한 적은 당연히 없었다. 의외로 내가 글로 칭찬을 받은 것은 뜻밖의 대학원 교수님에게서였는데 동화평론을 쓴 레포트였다. 그 이후 또다른 교수님에게서도 내가 합격한 이유가 글이라는 말을 듣고 혼자 얼마나 설렜던지... 베껴쓰는 것 외에는 배운 적이 없는 아이가 어떻게 봐줄만 하다는 글을 쓰게 된 걸까?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까닭을 알 수 없기에 불쑥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무질서하게 이곳저곳에 쌓여가는 잡글들을 볼 때마다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철새마냥 내 글 공간은 글이 모였다 떠났다를 반복했다. 


나 자신을 내가 아닌 다른 대상에 묶어둔다는 것이 힘든 사람이라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꽁꽁 숨겨뒀던 용기가 용기를 낸 모양이다. 아이를 낳고 합평이 뭔지도 모른 채 시 합평 모임에 들어갔다. 무모한 도전이었다는 것은 첫번째 시 합평이 있고나서 이내 깨달았지만 환대를 받는 그 기분이 좋았던지 나는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그들과 만나 시와 술을 나눴다. 그들은 얼토당토 않은 시를 꼬박꼬박 써내는 나를 무척 귀애해주었다. 그들 중 몇은 시인이 되었고 나는 더이상 시를 쓰지 않지만 그때의 경험이 무척 좋았던 것은 사람을 얻은 것 외에도 내가 단어를 생각하고 조합하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뱉고 싶은대로 글을 써 왔지만 내가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어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답을 얻은 적이 없었는데 이후로는 글을 쓰면서 단어를 선택할 때 공을 들이는 그 순간이 어찌나 소중하게 느껴지던지. 시 합평의 경험으로 되려 시인의 꿈은 꿈조차 꾸지 않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은 더 커졌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시를 쓰는 기계였다. 잘 써서 기계가 아니라 그냥 우리들의 놀이 방식이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친구들이 시제를 주면 즉석에서 시를 한 편씩 써서 주곤 했다. 일종의 주문제작 방식인데 친구들이 주는 시제는 '파리', '자외선', '대머리'와 같은 낄낄대기가 주목적인 활동이었다. 그래도 어떨 땐 나도 꽤 진지하고 감수성 담아 시를 쓴 거 같은데 친구들은 너무 진지해서 웃기다고 웃는 그런 나날들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좋아서 시를 쓰고싶었던 것일까? 시를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재밌는 말을 툭툭 던지는 데에 더 소질이 있었다. 말과 글 둘중 굳이 소질을 고르자면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글이 쓰고 싶었다. 말을 하는 직업을 얻은 것은 어쩌면 천직을 얻은 행운일수도 있지만 이는 직업을 선택하는 두 가지 요소인 적성과 흥미 중 적성에만 해당하는 행운이었다. 내가 흥미를 갖는 글쓰기, 그건 언제쯤 내게 가까이 올 수 있을까? 어릴 때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어른을 만났더라면, 학창시절 내가 가진 꿈을 좀더 명확히 알고 있었더라면, 내가 어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지 알았던 순간에 좀더 정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게으른자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과거의 만약을 영 외면하지는 못하겠다. 


최근 들어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하나 있다. "안 하고자 하면 수백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어." 그 말을 반복할수록 그 말은 아이들이 아니라 내게 와 꽂힌다. 그 모든 것이 핑계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지금도 여든 아홉번째 쯤 되는 이유 하나를 들고 어제는 이래서 못 썼고, 오늘은 이래서 못 썼다고 말하는 자신을 이 말을 통해 마주하는 것이다. 아주 더딘 발전이지만 이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학창 시절 사물을 관찰하며 시를 쓰는 재미를 발견하고, 십여 년 전 내가 단어를 취사 선택하는 데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흔이 넘어 더 이상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되는 아주 느린 속도로 말이다. 지금 이 글도 그 과정의 하나가 아닐까? 지금의 글이 어제의 글 보다는 낫고, 내일의 글이 오늘의 글보다는 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