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일기] 아름다움, 그 안에 속하고 싶다.

<일무> , 세종문화회관

by 횸흄

어떤 공연은 졸음을 불러온다. 각오한 일이라 옆좌석의 아들에게도 졸리면 좀 자도 된다고 말해두었다. 주먹을 꽉 쥔 긴장감이 옆자리에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 한국무용 공연이라니' 아들은 안 갈 이유를 만들었었고 나는 그 이유들을 모르는 척 했다. 그렇게 온 자리이니만큼 내가 강하게 나갈수록 아이는 강하게 엇나갈 것이었기에, 더구나 이 아이는 그냥 둬도 최소한의 관람을 할 태도를 지닌 아이라는 걸 알기에 긴장된 두 주먹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 번 쳐주면서 관람을 시작했다.

문무-연합뉴스.jpg 1막의 문무_ 출처 :연합뉴스

1막은 문관과 무관의 춤으로 구성되어 1장과 2장은 남색 옷을 입은 문관들이 이런저런 대형을 변형해가면서 춤을 추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졸음은 커녕 저렇게 대형을 변형하는 것이 얼마나 수고로운 일인지를 짐작하느라 집중해서 관람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들이 입은 복장의 쪽빛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남색이라니!' 내내 감탄을 하며 옷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고 싶어졌다. 적당히 흐리고 적당히 푸르며 적당히 묵직한 남색이었다. 그런 남색이라면 나는 한복은 물론이거니와 원피스로도 입고 싶고, 셔츠로도 입고 싶고 스커트로도 입고 싶어졌다. 저 남색 옷을 만져볼 수 있다면...

무무-연합뉴스.jpg 1막의 무무_출처 : 연합뉴스

아들은 무관들이 검을 들고 추는 춤에 더 집중해서 보는 듯 했다. 무무는 3장과 4장에 이어졌는데 문무와 마찬가지로 종묘제례악에 맞춰 춤을 추었는데 파도타기의 향연처럼 보였다. 하나의 파도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파도가 이어지고, 그것이 세 번 네 번 이어지기도 했다. 하나의 파도가 끝나고 똑같은 파도를 다시 타던 파도타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순간으로 그것이 전통무로 구현된다는 것에 놀랐다. 원래 전통무 동작에 있었던 것이라면, 도대체 세상이 진화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하는가! 세상은 점점 더 단순화될 뿐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검을 뒤로 넘겨 파도를 타자마자 옆으로 넘기는 파도를 하고 그것을 하자마자 자리를 이동하는 파도타기를 하는 등 무관들의 움직임은 민첩하고 날래 문관의 춤과는 다른 멋이 있었다.

2막을 하는 동안 아마 아들과 나는 좀 졸았다. 취향에 좀 덜 맞기도 했지만 무용 이외의 요인이 작용했다는 편이 더 맞았다. 우리는 늘 피곤하다. 무용 내에서 굳이 이유를 찾자면 왕실의 연회에서 추는 궁중무에 대한 삐딱한 마음이 내 안에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저 많은 여인들이 왕의 기쁨을 위해 추는 춤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이 나도 모르게 들어 좀 쉬어가자 싶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조는 와중에도 귓속에 꽂히는 창만큼은 매혹적이었다. 어찌 들으면 늘어지는 듯한 가락이 옛날 할머니들의 창 같기도 하고 톤으로 보자면 중국의 경극에서 느꼈던 톤 같기도 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창이었다. 그 창을 들으며 졸았고 창을 들으며 잠을 깼다.

3막은 전통무를 재해석 신일무는 의상부터가 매력적이었다. 몸통이 빨갛고 날개가 하얀 나비가 등장하는 듯하더니 입은 옷이 치마가 아니라 바지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화선지에 복장과 동작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 여백의 미가 드러나더니 점점 대형을 갖추며 늘어나는 무용수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동작들이 눈을 뗄 수 없었다. 옆자리의 아들도 감탄을 하는 것이 느껴졌고 관람석의 누구나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비의 날개 대신 몸에 달라붙는 남색의 상의는 저고리를 변형한 것인데 문관의 쪽빛과는 다른 채도였다. 아니면 빨강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색의 문관과 자색의 무관의 복장이 한데 섞인 그 의상으로 현대적이면서 전통적인 그 동작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저 안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마음은 문무에서부터 들었다. 거의 움직임이 없다시피한 버티는 동작들을 칼군무로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왜 칼군무를 잘 하는지 알게 된 것은 둘째치고 일단은 그 안의 한 사람으로 서서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커튼 콜 때 보여준 발랄함들을 모두 삭제한 그들의 하나된 동작들은 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애씀에 동참하고 싶었다. 아니 그 보다는 그들이 보여주는 각색의 아름다움의 완성본에 내가 속해있고 싶었다. 아름답다는 것은 저런 거구나, 하나의 아름다움은 감탄을 불러오지만 우리의 아름다움은 훨씬 큰 감동을 주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들 밖에 있는 내가 무척 속상했다.

KakaoTalk_20220523_101958244.jpg 커튼콜 때 무용수들은 전체의 아름다움을 위해 꽁꽁 감춰둔 제각각의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공연장을 나오면서 아들과 투닥였다. 발끈하는 나와 아이의 모습이 공연장에서 본 아름다움에 비해 너무 초라한 생각이 들면서 나는 그만 마음을 가라앉혔고 우리는 이내 함께 다정해졌다. 아름답다는 건 쉬운 듯 쉽지 않은 수식이다. 어떤 무리의 안에서 그 무리의 아름다움을 위해 애쓰는 것,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능력을 올리고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나는 아름다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내 아이는 아이의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차지하도록 기르고 있는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준 공연 하나를 보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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