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교수는 안희경과의 인터뷰집 [최재천의 공부]에서 독서는 '빡세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취미로 하는 독서는 시력만 버릴 뿐이란다. 이 부분을 읽고 J와 나는 무릎을 쳤다. 그래, 책은 빡세게 읽는 거지! 이 말에 완벽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 책을 읽은 적도 많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도 읽었으나 그것이 오로지 시력을 나쁘게 하는 일이었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들의 면면을 보면 과연 책은 '빡세게 읽는' 대상이 맞다는 데 마음이 간다.
책읽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 '나는 왜 읽는가?'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대작가들이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해 내놓는 거창한 답처럼 나는 그럴 듯한 답을 내놓을 수 없어서 자꾸만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 답의 종착역이 나도 궁금하다. 그동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끔 멋들어진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결국은 위안이나 휴식, 친구 등등 남들과 비슷한 이유를 댔다. 최근에는 그것들을 포함해 앎, 이해, 몰입할 대상, 현실 도피 등 이유가 다양해진다. 그중 앎을 위한 독서의 비중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내가 모르는 세계(지식)를 북클럽을 통해 만나고, 그로 인해 내 세계는 넓어진다. 나에게 매몰되었던 생각들을 바깥으로 꺼내려는 몸짓이 아직은 소극적이지만 생겨나고 있다. 안다는 건 퍽 벅찬 일이다. 그 벅차는 기분을 나는 책으로 느낀다. 그렇다면 나는 앎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하지만 요사이 문득 내게 책은 종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신론자로 40여년을 살아왔는데 어쩌면 내게는 책이 있어서 종교가 필요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삶은 오래 산다고 무게가 덜해지고 명료해지는 게 아니라 살수록 무거워지고 복잡해진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힘든 시간이지만 그 힘든 '지금'은 언제나 업데이트 되게 마련이다. 20대엔 쉰 살이 되면 모든 것이 정리될 줄 알았는데 마흔을 훌쩍 넘겼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힘든 시기를 무사히 지나게 도와준 것이 내겐 책과 글이었다.
적응하기 힘들었던 대학 생활 내가 가장 편안함을 느낀 공간은 도서관이었다. 그중 인적이 드문 정기간행물실에 가면 나는 늘 혼자 계간 잡지들을 읽으며 창밖을 통해서만 겨우 밖과 소통할 수 있었다. 오, 도서관 신이시여! 그 편안함이 너무 좋았고 아이들이 나더러 '도서관 자판기 운영자'라는 별칭을 만들어줄 때쯤 나는 도서관을 벗어나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폭발적으로 늘어난 독서량과 갓난 아이를 두고 시 합평 모임에 나갔던 용맹함은 책과 글이 내게 신이었다는 데에 힘을 싣는다. 사람들 많은 종교 시설에 가는 건 내 삶을 더 복잡해지게 만드는 일이기에 종교 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종교 생활이 아니라 신앙심이라는 본질을 생각하다 오늘 아침에는 문득 종교를 가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의 힘듬은 지금도 업데이트 되는 중이구나! 책으로도 해결하지 못해 더 강력한 신을 원하는 중이다. 어젯밤부터 급습한 삶의 무게가 오늘 아침에도 덜어지지 못하고 출근하면서까지 이 무게도 덜지 못하면서 '나는 왜 읽고 쓰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무신론자가 변심할 정도 오늘 아침에는 책과 글에 대해서 회의가 들었다. 책을 쌓아놓고 읽는 내 습관에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하고, 글을 쓴답시고 삶의 무게를 굳이 더하는 나 자신이 고집스러워보였다. 굳이 왜 읽고 쓰느냔 말이다. 버스를 타고 오며 한강을 볼 때 잠시 가슴이 뻥 트였다. 책보다 좋은 것이 저기 있구나! 그냥 밥 먹고 일하고 쉬고 그러면 되지 굳이 왜 읽느라고 낑낑거리고 쓰느라고 머리를 쥐어뜯는지 오늘은 한심스러워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안다. 결국은 읽고 써야 한다는 것을. 그것도 빡세게 읽고 써야 한다는 것을. 지금은 글이라는 신을 섬기는 자로서 불경한 생각을 하는 찰나의 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알기 위해 읽고, 그 앎으로 느끼기 위해 읽고, 느낀 것을 쓰기 위해 읽는 사람이다.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떠올려 보아도 나는 읽는 만큼 썼었고, 읽는 것을 내용으로 썼었고, 쓰기 위해 읽었다. 이제 답은 나온 듯 하다. 결국 나는 쓰기 위해 읽는 사람이다. 생각조차도 쓰면서 정리가 되는 사람 말이다. 지금 이 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