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따뜻한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친구를 통해 개인사업을 한다는 남자를 소개받았다. 내 형편에 연애는 사치였지만 답답함을 잠시 잊고 싶었다. 별 기대 없이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다부진 몸매, 아이처럼 잘 웃는 한 남자를 만났다.
평소 ‘곰돌이 푸우’처럼 퉁퉁하고 착한 남자를 꿈꾸었지만, 이 남자를 만나는 순간 나의 이상형이 뒤집혀 버렸다. 영화관이 아닌 바다로 드라이브 떠나는 로맨티시스트, 늘 손에 깍지를 끼며 ‘사랑한다’고 다정히 말하는 이 사람, 지쳐 있던 나에게 그늘이 되어주었다. 마음을 정하고 시작한 연애는 빠르게 결혼까지 이어졌다. 결혼 후 사업을 키우기 시작한 남편은 얼굴 마주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빴다.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꽁냥꽁냥 그리던 신혼생활은 멀어져 갔다.
내 외로움의 불똥은 학창 시절 취미였던 쇼핑으로 튀었다. 심지어 남카라는 거대한 무기를 들고 합법적인 쇼핑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정판에 영혼을 팔아버린 새댁은 출근하기 위해 씻고 있는 남편의 화장실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 다반사였다.
나는 집안일 봐주시는 이모님 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다가 매일 백화점으로 향했다. 잘생긴 대리 주차 청년들이 나를 활짝 반기며 차 문을 열어주고 어디를 가든 왕비 대접을 받는 곳. 내가 쓰는 돈다발에 포함된 당연한 서비스에 홀려 나는 지갑을 거침없이 열었다.
결혼 4년 차, 나의 백화점 데일리 투어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야 멈추어 섰다. 잘 나가던 남편의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임신 8개월, 넷째를 임신한 몸으로 떠밀리듯 경기도로 이사하게 되었다. 5년이 넘게 아이들을 봐주시던 이모님은 이렇게 된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서울에서 일산까지 출퇴근하며 무보수로 1년, 우리 가족을 돌봐 주셨다.
남편은 잃은 재산보다 사람에게 실망하여 무너져 내렸고 나는 그런 남편을 보며 철없던 나 자신을 떠나보냈다. 이제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내 역할을 해야만 했다.
이모님 손에 크던 아이들의 육아부터 시작했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선택한 엄마표 학습, 어려운 현실을 아이들 육아에 매진하며 이겨내려 애썼다. 처음 하는 집안일에 4남매 육아까지 도맡은 나를 보며 남편은 어쩔 줄 몰라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아내, 엄마의 역할인데 미안해하는 남편을 보니 그동안 철없이 살아온 내 모습이 상기되었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버거운 현실 때문이었는지, 한없이 이기적으로 변해 갔다. 주변의 도움은 당연하게 받았다. 감사한 마음보다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내가 이만큼 해내고 있다는 자만감이 하늘을 찔렀다.
아이들의 육아에 과몰입하는 나를 걱정하는 부모님의 염려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내가 옳다고 확신했다. 국정원보다 철통 같은 나의 세계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웠다. 가끔 예기치 않게 생기는 아이들의 경로 이탈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내가 만든 견고한 세계가 타인에 의해 흔들리고 무너지지 않도록 항상 대비하고 막아내려 애썼다. 6년 동안 나는 매일매일 긴장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게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라 믿었다.
그 사이 남편은 몇 번의 검찰 조사를 받았고 아직 폭탄 맞은 세금을 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생각하며 마음에 묻기로 했다.
‘내가 이번에 바닥을 치면서 기분 더러울 때가 많았는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사람이 딱 걸러지더라.
진짜 내편하고 내편인척 하는 사람들.’
늘 가장 가까운 사람, 믿었던 사람들이 뒤통수를 친다. 우리는 많이 아팠던 만큼 단단해지고 견고해졌다.
처음으로 남편과 내가 ‘부부’라는 이름에 걸맞게 된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위대한 개츠비’의 한 문장을 생각했다.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문제 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맑게 갠 아침에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