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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키 Oct 24. 2023

겨울은 길고 나는 두렵다

초등의 마지막 겨울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중학교 배정 통지서를 받고 교복을 맞추러 갔다. 아주머니께서 남자아이들은 늦게 큰다며 교복 사이즈를 두 치수나 크게 권하셨다. 범이는 꼭 아빠 옷을 입은 것처럼 볼품이 없었다. 안 그래도 작고 왜소한 체형이 교복 안에서 허수아비처럼 흐느적거렸다. 다른 아이들도 다들 그렇게 맞추는 듯하여 가만히 있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내가 범이의 작은 키를 걱정하면 어머니는 항상 “아빠 닮아서 큰다.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구시렁거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기껏 남편만큼 키우려고 그러는 건가, 모…. 요즘은 185cm는 넘어야 큰 키라던데!’ 

자고 일어나면 한 뼘씩 커 있는 둘째가 오빠 키를 넘기려 하자 나는 조바심이 났다. 성장에 좋다는 영양제를 먹이고 ‘키 키우기’라는 광고에 혹해 농구도 등록했다. 그렇게 걱정 반 희망 반으로 범이의 중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제 제법 아이티를 벗고 의젓해진 범이는 말수가 줄고 가끔 말대꾸를 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조금 당황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도 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고 하키팀 주장으로 초등 국가대표로도 발탁이 된 금쪽같은 내 새끼. 해외 출전까지 경험하며 초등생활을 빛나게 마무리한 범이가 아닌가. 

나는 중학생이 된 범이의 공부 시간을 더 타이트하게 관리하며 특목고를 보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처음 다니기 시작한 학원 생활도 잘 적응하는 듯 보였고 학교생활도 별 탈 없어 안심하고 있었다. 

핵폭탄보다 무서운 사춘기의 그림자를 나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 마음대로 쥐락펴락했던 시기가 길었던 만큼 돌아오는 아픔도 컸다. 매일 눈뜨면 눈을 감는 밤까지 소프라노로 응답했다. 나의 외침은 거대한 산에 부딪혀 메아리로 돌아왔다.

나는 육아 선배들의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지 않았다.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범이의 모습에 집착하며 혈안이 됐다. 

어느 날 저녁, 만취 상태로 들어온 남편이 말했다. 

“너만 잘났지? 너만 옳은 거 같지?”

외마디 지르고는 소파에 쓰러지더니 나를 벌레 보듯 쏘아보다가 눈을 감았다. 내 검은 욕망을 착한 남편은 알고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아팠다. 

남편과 아이들의 감정에 두 눈을 질끈 감고 버틴 결과는 참담했다. 나도 엄마는 처음이니까, 어떤 게 올바른 교육인지 몰랐다는 무지한 이유를 대며 도망쳤다. 싸움에 이기고 싶어 안달이 난 투사 같았다. 어느새 나는 사나운 마녀가 되어 있었다. 어린 4남매의 상처에 힘들어하는 남편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14년을 쌓아 올린 좋은 엄마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간식거리를 준비하고 학교에서 돌아올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친한 언니의 이름이 떠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응, 잘 지냈지?” 

“그럼요~ 웬일이세요?” 

“아니, 내가 본 건 아니라서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범이가 학교에서 좀 논다는 아이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운다는 이야기였다. 앞이 캄캄했다. 범이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붙잡고 다그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범이는 공부하기 싫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는 약속도 끝내하지 않았다. 아이는 보란 듯이 혹독하게도 나를 몰아붙였다. 

이번에는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다른 동네 남자아이들이 지나가다가 한 친구와 시비가 붙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범이와 친구들이 쫓아내려 가면서 패싸움이 된 것이다. 

다행히 먼저 시비를 건 무리가 파출소에서도 살피던 아이들이라 큰 피해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파출소를 나왔다. 범이는 파랗게 질린 내 걱정보다 아직 부모님이 오지 않은 친구들 걱정에 걸음을 떼지 못했다. 순간 범이가 너무 밉다는 생각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너 혼자 한 거야?, 나도 최선을 다했어!!”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시간이 억울하게 느껴지자, 가슴에서 불이 올랐다. 

소리를 지르다가 아이의 빛을 거둔 눈동자를 보았다. 절망적인 아이의 초점 없는 시선, 나를 경멸하는 태도, 하루가 멀다고 소리 지르는 나를 지켜보던 딸들의 공포 어린 시선들까지 순간 오버랩 되었다. 

어린 시절 놀이터보다 좋아하던 레고를 맞추며 몇 시간이고 놀던 나의 소중한 4남매들. 모아 놓으면 똑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율동하며 나를 웃게 했던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 바쁜 시간을 쪼개 주말이면 한강, 놀이동산, 동물원 곳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 그 시간을 가장 행복해하던 남편의 모습. 즐거웠던 추억들을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우리가 함께 만든 눈부신 성과라 당연하게 믿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눈이 가려져 그 안에서 금이 가고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내가 다 망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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