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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키 Oct 31. 2023

싸우는 여자와 연대하는 여자

범이의 사춘기는 계속되었다. 누구는 중3이면 끝날 거라 말하고 누구는 고등학교 가면 끝날 거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그럴싸한 근거를 대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 시작하는 사춘기가 더 문제라면서 제 나이의 사춘기가 낫지 않겠냐고 위로하였다. 

 둘째 나연이도 호르몬의 변화를 겪으며 사춘기 극단에 입성했다. 서막도 화려하게 올랐다. 매일 3시간씩 하는 수영이 힘들다며 떼를 쓰는가 하면 선생님 말씀에 맞서는 일도 꽤 되었다. 두 번째이니 덜 아플 법도 한데, 자식 문제여서인지 아물기 전에 넘어져 더 크게 벌어져 버린 상처 같았다. 결국 나연이는 중학생이 되기 전, 겨울방학 생리를 핑계로 수영을 그만두었다. 발레는 계속, 이라는 확답을 받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육아서적에 나오는 ‘적당히 손님 대하듯 하라’는 의미를 행동으로 옮기는 게 아무래도 어렵다. 내가 정한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을 가르치려니 잔소리가 줄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쏠린 시선을 돌리기 위해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나의 아침은 항상 분주하고 어수선하다. 식구 다섯이 빠져나간 자리는 폭격 맞은 전쟁터처럼 난장판이다. 가장 먼저 반찬 냄새나는 식탁부터 치운다. 방마다 벗어 놓은 옷들은 들고 나와 세탁기에 밀어 넣고 시작 버튼을 누른다. 

 예외 없이 바쁘게 움직이던 그날 아침은 왜 그랬을까. 설거지하며 부엌 창문을 내다보니 쌩쌩 달리는 차들이 문득 부러워졌다. 다들 어디론가 자기 역할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나가고 싶었다. 순식간이었다. 고무장갑을 벗고 화장실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맘이 바뀌어 청소기를 손에 들기 전, 나갈 준비를 마쳐야 했다. 샤워하고 머리도 대충 말렸다. 

 옷장을 열고 화이트 코르덴 바지에 시스루 블랙 폴라 상의를 꺼내 입었다. 긴소매 위로 까르띠에 검정 시계를 차고 그레이 톤이 막스마라 테디베어 코트를 무심히 걸쳤다. 차 키와 지갑, 휴대폰만 챙겨 들었다. 까만 웨스턴 부츠에 바지 밑단을 찔러 넣고는 손잡이를 힘껏 돌려 현관문을 밀어제쳤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무작정 파주 방면 자유로를 탔다. 창문을 열어 겨울바람을 맞으니 덜 말린 머리카락이 딱딱해져 얼굴을 쳤다. 막상 저지르니 별거 아니었다. 해방된 기분이었다. 한참을 달려 헤이리에 있는 시네마극장에 도착했다.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 온 건 아니었지만 그 시간 관객이 딱 2명이라 주저 없이 티켓을 끊었다. 

 헤이리 시네마는 찾을 때마다 사람이 없다. 간혹 있는 사람도 나처럼 혼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큰 공간에 띄엄띄엄 편안한 자세로 앉아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편안하고 안심이 되어 좋았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2시간의 자유를 선물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요즘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 애써보지만 언제나 실패로 끝나곤 했다. 영화가 끝났는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득히 멀어진 기억을 다시 붙잡아 현실로 불러들였다. 주섬주섬 의자에 걸쳐놓은 외투를 집어 들고 휴대폰을 챙겨 내려왔다. 진한 커피 향이 온몸을 감쌌다. 그제야 나는 커피도 마시지 않고 뛰쳐나왔다는 걸 실감했다. 크루아상과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잔 주문하고 돌아보니 진열된 책들이 눈에 보였다.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가만히 책을 집어 들었다, 안개 자욱한 들판을 뛰는 소녀, 푸르른 책 표지, 무엇보다 제목이 내 마음을 당겼다. 책을 사서 커피를 받아 들고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가가 나랑 동갑이네!

 ‘나는 대체 뭘 하고 산 거지? 누구는 이렇게 책을 몇 권씩이나 썼는데…’ 

 책의 뒤 표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야망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야심 차 보이는 여자. 40대에 접어든 나는 그런 여자였다. 욕망하기보다 욕망을 지우고 싶었다. 욕심과 질투로 마음에 옹이가 지는 게 싫었다. 그러면 결국 내가 상처받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었다.’ 

작가의 말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내 마음이 보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식어버린 커피와 딱딱해진 크루아상이 그대로 있다. 벌써 4시가 넘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막내가 집에 왔는지 부재중 전화가 3통이나 와 있었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음도 걸음도 가벼워졌다. 가끔 이렇게 혼자 나와서 바람 좀 맞아야겠다. 일상에서의 짧은 쉼표가 느낌표의 에너지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 있는 도서관에 들러 ‘곽아람 작가’의 책을 몇 권 더 빌렸다. 

나갈 때 보다 더 엉망이 되어 버린 집구석을 빠르게 정리했다. 서둘러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둘째, 셋째가 달려와 “엄마, 저녁밥 뭐야?” 묻는다. 

“미역국하고 돈가스, 손 먼저 씻어!” 대충 손을 씻고 부엌으로 온 둘째가 식탁에 쌓여 있는 책들과 내 옷차림을 보더니 눈치를 슬슬 살렸다. 

“엄마 어디 갔다 왔어?” 

“응!, 헤이리” 

“저 책은 뭐야?” 

“내 책이야.” 

“아~밥은 몇 시에 먹을 거야?” 

“6시” 

둘째는 내 눈치를 가장 많이 살피는 아이다. 내 차림새를 보고 ‘뭔 일 있나?’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내 옆을 서성이다 돌아서는 둘째를 보면서 또 이기적인 내 마음만 떠벌리게 될까 두려워 모른 척했다. 나는 여전히 내 상처가 더 큰 이기적인 인간이다.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덜어 내지 못하고 자꾸만 삶의 무게만 더해져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미련한 성격 탓에 몸이 부서져라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고 나를 몰아붙인 상태라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다. 그런 내게 오늘은 다른 날의 시작이 될 거라 믿고 싶게 만든 책을 발견했다. 저녁을 차려주고 빌려 온 책을 읽기 시작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을 읽으면서 잊고 있었던 어린 날의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되고자 했던 사람, 살고 싶어 했던 모습! 어떻게 삶의 존엄성을 지켜야 하는지까지.

 이제 어쩔 텐가!.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갈 것인가? 

내가 나에게 묻는다. 

나만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는 걸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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