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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아 Sep 16. 2023

여름의 초입에서

여름 휴가의 순간


다정이란 단어에 봄바람을 불어넣는다면 네가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꺼리는 일을 나서 하면서 안색 하나 안 바뀌는 사람. 미안해하는 상대에게 이게 편하다며 너스레를 떠는 사람.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게다가 다정한 사람이 재치 있기는 어려운데 너는 그 힘든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 으레 그랬듯 나도 너의 곁에서 더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파하하하 하는 웃음소리를 자주 듣고 싶었고 너의 성격을 부러워했다. 인지하기도 전에 너는 내 곁에 있었고 나도 그게 거슬리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우리가 속한 무리에 여름 여행을 제안한 건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여름휴가다운 여행을 간 적이 없었던 터라 이번 여행을 여러모로 기대하고 있었다. 고심 끝에 목적지를 강릉으로 정했고 여유로운 동해를 즐기기 위해 초여름으로 약속을 잡았다.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가 오늘이 된 아침, 일찍부터 사 온 김밥과 커피를 챙겨  해변을 향해 차를 내달렸다.






시끄러운 빌딩 숲을 벗어나 바다로 달리던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점심을 먹기 위해 들린 식당에서 너와 대화를 나눴을 때 이전까지와 다른 거리감과 어색함을 실감했다.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서 그럴까 대면한 지 오래되어서 그런 걸까. 여태까지의 친밀감은 착각이었나 싶었다. 눈앞에는 강릉에 별미라는 물 닭갈비와 푸르른 바다가 있었지만 어쩐지 겉돌게 되는 대화들을 곱씹는데 신경을 쏟게 되었다. 쉽게 불안해하고 부정적으로 생각이 흐르는 나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잘 못한 게 있는지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 이곳이 휴가지라는 사실이 떠올라 기분 탓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짓고는 어느새 앞서가고 있는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뜨겁지는 않던 태양도 그 태양에 따뜻해지지 않았던 바다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밤, 숙소 앞 테라스에서 저녁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후의 걱정은 언제 있었냐는 듯 잊혔고 숯불 바비큐에 눈이 돌아가 있었던 참이었다. 바비큐는 언제나 음식의 맛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누군가의 희생과 인내심이 필요한 요리법이었다. 식탐이 많은 나는 맛있는 고기를 먹지도 못하고 서 있을 재간이 없었다. 덩그러니 놓인 그릴을 못 본 척 한 채 주변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너는 캐스터네츠처럼 집게로 챙챙 소리를 내더니 제 자리를 찾아가듯 불 앞에 섰다. 손으로 그릴의 온도를 체크하고 고기를 그릴 위에 올리는 동작이 능숙해 보였다. 냉장고에서 금방 꺼내 차가웠던 고기는 취이익 소리를 내며 불판 위에 몸을 뉘었다. 그렇게 덥지는 않았지만, 뜨거운 불 앞에서 고기를 굽는 일이 중노동처럼 느껴진 나는 앉아있지 못한 너에게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빨리 익은 버섯을 안주 삼아 시원해진 소주를 한 모금에 털어 넣는 너의 표정은 술을 마시지 않는 나조차도 소주의 맛을 궁금하게 했다.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불판 위 고기를 보고 있는 우리를 보며 너는 말했다.


“회사 그만두면 고깃집 차릴 거야.”


고기를 좋아해서 고깃집을 차린다는 걸까. 눈에 보이는 김치를 집어 오물오물 혼자 생각에 잠겼을 때쯤 다시 네가 있는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기 구우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잡념도 없어지고.”


오글거릴 수 있는 문장이 평소와는 다른 진지함에 하나도 웃기게 들리지 않았다. 고기 굽는 네가 소외되지 않게 말을 걸며 관찰한 너의 모습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라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고기 굽는 게 뭐라고 그리도 좋아하는 걸까. 이해할 수 있는 최대한에 닿으려고 노력하다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내뱉었다


“고기를 구워서 누군가를 준다는 게 좋은 건가?”


“그런 건가. 잘 모르겠네.”


너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고기 자르는 일에 열중했다. 너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나만 보기는 아까운 장면을 바라보면서 네가 꿈꾸는 미래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기를 굽는다는 게 세상을 구하는 일도 대단한 발명도 아니지만 최소한 한 명은 행복해한다는 걸 알았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급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고깃집 금방 열겠다. 이 정도 실력이면 손님들이 줄 서겠어. 사람만 잘 쓰면 되겠네.”


“나중에 식당 차리면 서비스 줄게.”


잘 구워진 고기를 접시에 옮겨 놓으며 너는 옅은 웃음을 띠었다.



만족할 만큼 고기를 먹었던 터라 너 대신 불 앞에 섰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너는 볼이 붉어져 있었다. 더 자주 웃고 더 자주 즐거워했다.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그제야 낮에 느꼈던 기시감이 뭔지 알았다. 항상 술자리에서 만났던 터라 알딸딸해진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맨정신이라 알게 모르게 벽을 세우고 있었던 너였다. 이제야 거리가 좁혀진 게 실감했다. 술을 먹으면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 사람들에게 내밀한 모습을 보여줄 용의가 생기는구나. 너의 표정과 눈빛 행동을 보며 술 좋아하는 사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게 좋아. 사람들이랑 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게.”


“그래. 그렇게 보여.”



불씨가 꺼져가고 있는 숯과 손도 안 댄 몇 점의 고기들, 비워진 빈 병만이 덩그러니 테이블에 남아있었다. 내일이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침울해졌을 때 맞은편에 앉은 너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에도 숙소 앞 바다에서는 파도가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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