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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아 Jun 27. 2022

느끼지 못했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Prologue: 가랑비 내리는 어느 날





‘첫눈에 반하는 사랑 vs 천천히 스며드는 사랑’




테이블 톡이라는 여러 카테고리의 질문이 담겨있는 카드를 가지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연애에 관한 질문이었다. 질문 카드를 보자마자 ‘그’가 생각났다. 내가 첫눈에 반한 그.




-




독서 모임에서 처음 만나게 된 그는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재치 있는 말투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글로 담아내는 능력,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해온 다양한 경험들, 절로 눈이 가는 사람이었다. 첫 모임 이후 2주일 동안 이름과 직업밖에 알지 못하는 그에 대해 생각했다. 주마다 올라오는 그의 글에서 함께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하나하나씩 조각을 맞춰갔다. 맞춰진 조각들로 그와 있었던 일들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Rewind, Play. Rewind, Play. Rewind, Play….




머릿속에 되감기와 재생 버튼을 쉬지 않고 눌렀고, 그가 저장된 테이프는 끊임없이 돌아갔다. 3시간의 대화, 4편의 글로 이미 그와 수십 번은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나는 이 사람에게 빠졌구나.




이 이야기를 들은 지인은 나를 금사빠라고 놀렸다. 사실만 놓고 보자면 한 번의 만남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꼈으니 금방 사랑에 빠진다는 뜻에 부합했으나, 단어가 주는 가벼운 이미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눈에 반했다고 애정의 깊이가 가벼운 것이 아닌데, 만난 횟수로만 감정의 진정성을 따지는 것 같아 거슬렸다. 가벼운 감정이라면 이때까지 일상생활에서 집중하지 못하고, 그를 보고 싶어 애달파하는 이 감정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이후로 누구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는데, 혼자서 금사빠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사실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 납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편의 글과 몇 시간 만의 대화로 사랑에 빠지는 일이 가능한가. 그러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할 만한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처럼 이렇게 첫눈에 반하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니다. 이런 기이한 일은 모든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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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을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입해보면, 가랑비로 사랑에 물드는 마음을 시각화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인지한 순간부터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해서 옷이 안 젖은 건 아니다. 알지 못하더라도 옷이 점점 물기를 머금게 된다면, 옷이 젖어 들어가는 순간부터 사랑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감정은 이미 싹트고 있을 테니.



나도 물론 가랑비가 처음 내리던 순간을 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다만 옷이 축축해졌다고 인지하게 된 순간, 언제부터 비가 내려서 옷을 적셨는지 기억을 되돌려볼 뿐이다. 그러면 그 시점은 보통 첫 만남이었다.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나의 세계에서 그가 이름을 가진 특별한 개체가 되기 시작한 것이. 결국 금사빠라고 놀린 지인도 나와 같은 속도로 사랑에 빠진다. 다만 사랑의 시작을 어디로 볼지에 대해서 의견이 달랐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첫눈에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Windy day





널 닮은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온다. 내 바람개비는 빙글빙글 돌아간다.




-




처음에는 바람이 부는 줄도 몰랐다. 오다가다 보게 되는 바람개비가 평소와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손바닥을 하늘을 보게 들어 지금 바람이 부는지 손가락 사이사이 신경들을 깨워본다. 바람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했다. 다음 날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보며 의아했다. 지진이 일어나서 흔들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신발 아래로 진동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바람개비의 움직임은 진동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불 때만 돌아간다. 하지만 지금 바람은 불지 않는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또 다음날도 바람개비는 돌아가고 있었다.




‘핑그르르’.




바람개비를 바라보다 눈을 감아봤다. 시각을 차단해도 촉각이 살아나지는 않았다. 바람개비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선충전식이나 태양광 발전식으로 바뀌었나 싶어 바람개비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동력공급원이 바람 외의 것은 아닌 듯했다. 또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그 다음다음 날도 바람개비는 움직이고 있었다. 내 바람개비는 왜 돌까. 바람개비를 바라보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살랑’




오른쪽 신발 옆으로 나뭇잎 하나가 떨어졌다.




‘…’




고개를 들어 왼쪽에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니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 바람이 불고 있구나. 근데 왜 나는 바람이 느껴지지 않을까. 떨어진 나뭇잎을 줍기 위해 손을 바닥으로 뻗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장갑을 끼고 있다는 걸. 혹시나 해서 목 주변도 더듬어본다. 목도리를 둘둘 감고 있었다. 거기다 털모자도, 두꺼운 패딩도 손에 닿았다.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지난번 바람이 느껴지던 날, 신이 나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찾으려 했다. 이렇게 따스하고 나를 기분 좋게 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면 천국이 따로 없을 테니깐.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고, 가는 길은 도중에 막혀있었다. 더는 그곳으로 갈 방법이 없었다. 너무 실망한 나머지 다시는 바람을 느끼지 않도록 옷을 꽁꽁 싸매 입었다. 옷을 두껍게 입은 기간이 긴 나머지 내가 얼마나 껴입은 지 까먹고 있었다.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자 손바닥에 맺혀있던 땀방울들이 바람에 말라간다. 털모자를 벗자 나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패딩을 벗자 바람이 내 몸을, 내 마음을 간지럽히고 간다. 나를 관통하는 바람에 잠깐 움찔한다. 바람은 더 잘 느껴진다. 바람이 부는구나. 바람이 불고 있었구나. 이제야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소리도 잘 들린다.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그 장단에 맞춰 나뭇가지는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나를 향해 인사하고 있는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당신을 그려본다. 당신을 그릴 때마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바람개비는 이전보다 더 빠르게 돌아간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옷을 여러 겹 입었을 때의 다짐은 이미 희미해졌다. 나는 다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찾아내 보려고 한다. 내 바람개비를 움직인 당신을 찾아가려고 길을 나서본다.



이건 나의 이야기이기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신의 바람개비도 어딘가에서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고 있을지 모른다. 단지, 당신이 바람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오마이걸의 'WINDY DAY'의 제목과 가사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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