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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아 Apr 2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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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하지 않는 삶의 고단함

이따금 집이 아닌 곳에서 눈을 떴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가늠하기도 전에 추위와 어둠, 불가해한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야 했다. 예고도 없이 목적을 알 수 없는 시험에 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버티다 보면 자연히 집에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을 몰라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채운다고 해서 그곳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적을 물리치고, 야영하는 법을 알아야 했으며, 나를 지키는 수많은 방법을 배워야 했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기술들을 습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기술들은 불완전했다.




다른 사람들도 예고 없이 혼자 전쟁터로 등 떠밀리고, 혼자서 전쟁을 나는 법을 배우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가올 전투 전까지 챙겨야 할 것들을 짐으로 꾸리며 준비했다. 그들은 나처럼 혼자 전투에 뛰어들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팀을 구성해서 전투를 헤쳐나갔다. 그들이 부러웠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모일 수 있었으며, 목숨이 걸린 전투에서 어떻게 서로를 믿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한 궁금증은 나의 고단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전투는 당연히 혼자 출전하는 줄로만 알았던 나에게 갑자기 허망함과 그간의 고통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전투도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었다. 전투하면서 목숨을 잃지 않고, 마을로 무사히 돌아오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목표를 이룬 나는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개선장군처럼 성의 정문을 당당하게 들어와 사람들의 축하와 환호를 받을 수 없었다. 살아 돌아왔지만 잃은 것이 많았으며, 승리한 기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적인 승리를 하지 못했다는, 전리품을 한 아름 가져오지 못했다는 씁쓸한 패배감이 느껴졌다. 그저 조용히 성 한쪽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전투가 끝나고 난 후에는 치명상들을 입는다. 상처들은 주로 내상이며, 외상은 옷을 입으면 잘 보이지 않는 몸통 쪽에 생겼다. 그래서 다들 내가 전투를 치르고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웃음을 띠며 대화를 하면 사람들은 나를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혀본 순진한 소녀로 봤다. 참으로 우스웠다. 이런 반응들에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모험이었을지 모르는 여정을 나 혼자 전투라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나 검열했다. 전투의 경험이 창피했다. 상처들로 인해 가끔 기침에서 피가 나오기도 했으며, 전투의 악몽으로 밤새워 뒤척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상처들을 제때 사람들에게 보이고 치료했어야 하는데, 상처를 보이는 일이 나약한 일이라고 생각해 드러내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인해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전투의 경험은 상처뿐만 아니라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혼자서 나간 전투에서 언제 적의 기습이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은 다시 집으로 돌아온 평온의 순간에도 늘 무기를 손에 쥐고 주위를 경계하게 했다. 예민해져 있는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전투를 끝나고 성안으로 돌아왔어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왜 전투에 나가야 하는지, 나만 이렇게 괴로운지, 참으로 불공평하고 폭력적인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사실 원망스러운 운명은 내가 만들고 있었다. 전투에서 살아남는 법은 알게 되었지만, 남을 믿는 법은 알지 못했다. 나를 내보이고, 내던져 본 적은 없었다.


 


7년 전 전투는 다른 전투들과는 달랐다. 방치해두었던 상처들로 쇠약해 있었으며, 여태까지 만난 적 없는 새로운 적들과 환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번에는 마을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짙게 들었다. 절망적이었다. 지친 숨을 몰아쉬며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생각 없이 뻗은 손에 신호탄이 잡혔다. 평소라면 있는지도 몰랐을 물건이었다. 나는 자포자기에 심정으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의 도움으로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밤새 간호해 주는 친구 손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신호탄을 쏘아 올린 날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서 해내지 못했다고 해서 무능력한 것은 아니었다. 각자의 몫이 있을 뿐이었다. 하늘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도 신호탄은 쏘아졌다. 그날 이후 전투가 시작되겠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전투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군장을 주섬주섬 챙겨본다. 사람들에게도 조심스럽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해본다. 이들은 기꺼이 나와 동행해 주었으며, 전투에 같이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필요한 물품들을 손에 쥐여주었다. 나는 항상 여기 있을 테니 어서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도움을 청할 때마다 매번 미안했지만, 다음번에 내가 도와주면 될 일이었고, 돌아와서 맛있는 식사와 선물을 대접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전투를 준비하는 법을 새롭게 배워갔다.




그럼에도 전투는 수월하지가 않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전투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해냈다는 성취감과 다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상처를 내보이고 치료받는 일은 아직도 어색해서 잘하지 못하고 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고 약을 바르는 정도로 건강을 돌보고 있다. 앞으로 남은 전투가 얼마인지, 얼마나 가혹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래 왔듯이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것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나의 사람들과 나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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