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마주하는 연습
죽음을 마주하는 연습
위의 기도는 가톨릭 교회에서 하는 '선종기도'이다.
왜 내가 이 병에 걸려야 하는지, 왜 나인지, 내가 뭘 잘 못했는지...
죽음을 앞둔 분들이 느끼는 감정의 5단계가 있다고 한다.
시한부 환자들을 대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심리를 연구한 '엘리자베스 쿼블러 로스' 박사는 저서 'On Death and Dying(죽음과 죽어감)'에서 환자가 죽음을 인정하기까지 겪게 되는 다섯 가지 단계를 얘기한다.
1단계 : 부정(Denial)
제일 먼저 자신의 상황을 부정한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검사가 잘못되었을 거야'
2단계 : 분노(Anger)
분노와 불평을 토로한다.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지금이야'
3단계 : 협상(Bargaining)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연명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타협을 하려 한다.
'아이가 결혼할 때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
4단계 : 우울(Depression)
회복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모든 것을 포기한다.
침울해지고, 울기도 하고, 불면증이 생기기도, 또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한다.
5단계 : 수용(Acceptance)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정리의 시간을 가지며 초연해진다.
'나는 지쳤어'
요양보호사 교육이나 호스피스 교육을 받는 분들은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우연히 기사로 접한 뒤에 블로그를 뒤져 알게 된 내용이지만, 두 어머니의 일을 겪어본 나는 누구보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두 어머니는 죽음을 앞두었단 표현이 맞지 않는, 치료가 가능한 암 환자였던지라, 로스 박사의 5단계를 적용하는 게 적절치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암 진단을 받고 치료에 1년 여 시간을 보낸 환자를 지켜본 가족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모든 환자가 감정의 단계가 다 같을 수도 없고, 정도의 차이도 있을 수 있고, 순서의 차이도 있을 테지만, 로스 박사가 객관적인 용어로 정리를 해 놓은 걸 보니, 딱 '내 말이 그 말이야' 하고 싶을 만큼,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들이 선명해졌다.
우리 집에 계셨던 석 달간의 시간으로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의 감정을 다 읽을 순 없겠지만, 내 눈에 가장 크게 보였던 건 '분노'와 '우울'이었다. 다른 감정은 내가 눈치챌 수 없지 않았을까 싶다. 자식 앞이라 맘껏 울지도 않으시고, 크게 분노하지도 않으셨지만, 지인들과의 통화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드러내셨다. 처음엔 '분노'가 깊었고, 일주일에 한 번, 주사를 맞는 횟수가 더할수록, 구토도 심해지고, 기운도 떨어지고, '우울'이 깊어 보였다. 당시에는 식사를 챙기고 병원을 모시고 가는 걸로 나의 소임을 다한다고만 생각했었기에, 그 복잡한 감정들을 같이 얘기해보고 진심으로 위로해드리지 못한 거 같아, 지금 돌이켜보니 참 송구스럽다. 그때는 보호자로서 나 역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어쩌면 다시 그 상황이 되어도, 시어머니와 그런 감정을 얘기하라 하면 마음은 있어도 쑥스러워 못할 거 같다.
'선종기도'를 알게 되다
그 당시 나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외출이었는데, 장 보러 나와서 걷거나, 일주일에 한 번 도예 수업을 가거나, 일주일에 한 번 성당 구역 모임을 다녔었다. 보통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나와 비슷한 연령 대의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데, 성당 모임은 30대부터 70대까지 모인다. 신앙과 교회에 관한 이야기가 주가 되지만, 며느리이기도 시어머니이기도 한 신자들은 본인의 가정사까지 공유하게 된다. 나 역시 답답한 마음을 얘기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오곤 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분노'와 '우울'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덧붙여 나는 병 앞에, 죽음 앞에 그렇게 나약해지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던 거 같다.
그때, 한 나이 많은 자매님께서 위에서 언급한 '선종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죽음이 가깝지 않아도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라고. 역시 날라리 신자였던 나는 몰랐다. 제목만 보고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로만 알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나를 단단하게 해 달라는 기도라니..
그 후 나의 기도에서 '선종 기도'는 빠지지 않았다. 지치고 힘들 때만 하게 되는 기도일지라도 마지막에는 선종 기도를 바치며 부모님의 죽음과 나의 죽음 모두를 두려워하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들과 나는 다르다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나이 어린 자의 미숙한 자기만족이었다.
내가 갑상선 세침검사를 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건강 검진을 하면 갑상선에 결절과 낭종이 여러 개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꼭 추가적인 세침검사가 필요하단 말을 들었다. 몇 년을 미루다 올해 초 검사 일정을 잡고 갑상선암센터 교수를 만났다. 사진을 보며 교수는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모양이 좋지 않고 울퉁불퉁하며, 색깔이 반짝반짝하다. 이러한 경우 안 좋은 케이스가 많다"며 두 개를 세침 검사해보자 했고, 2주 후에 결과를 보러 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결과는 좋게 나왔다. 염려하던 바가 실현되지 않아서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니, 내가 싫어하던 병 앞의 '분노'와 '우울', 두 어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생에 회한이 왜 없겠는가? 그동안 당신들이 살아온 날들이 쭉 지나갔으리라. 원망도 있고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의 어머니들의 '분노'와 '우울'에는 당신 자식들을 고생시킨다는 미안함과 남아있는 남편에 대한 염려가 묻어 나온 것이라는 것을 이제 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정말 큰 병을 마주하게 되면, 나 역시 어머니들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걸 확실하게 느꼈다. 한 술 더 떠, 로스 박사의 5단계 감정을, 단계별로 팍팍, 아주 확실하게,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드러내 놓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 어때서? 안 죽겠다는 것도 아니고 죽기 전에 말 좀 하고 죽겠다는데 뭐?
이제 나의 '선종 기도'는 다르다. 죽음 앞에 의연하고자 '선종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나와 부모님들의 행복한 '선종'을 위한 기도이다. 앞으로의 인생을 충분히 더 즐기고, 아름다운 추억을 가득 안고 떠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살아있는 지금의 우리를 위한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