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옹기 촌이다. 서모 밑에서 서럽게 자란 외할아버지가 결혼 후 공장을 세우면서 옹기마을이 시작됐다.
주위 마을 배고픈 사람이나 기근을 피해 올라오던 아래지방 사람들이 맘씨 좋은 부잣집이라는 소문을 듣고 외갓집으로 찾아들었고 조부모님은 그들을 사랑채에 들여 식사 대접을 해서 보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더러는 외할아버지가 옹기 만드는 기술자로 키워 결혼까지 시켜 살림을 내 준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을이어서 옛날 대부분의 시골마을이 집성촌인 반면 그곳은 각성바지의 마을이 된 것이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의 직업은 옹기를 만드는 옹기장이, 그 공장에서 옹기를 받아 밖에 내다 파는 옹기장사들이었다.
데릴사위로 들어와 처갓집 회계를 맡아보시던 나의 아버지도 몇 년 후 어머니와 서울 남산 아래로 살림을 나며 지금의 인현시장에 옹기 전을 내 장사를 시작하셨고, 몇 년 후 한국 전쟁(6,25)이 발발해 처가 마을로 다시 내려가게 됐다.
이후 그 동네에서 내가 태어났고 친구들과 하는 소꿉놀이는 깨진 옹기조각으로 시작했다. 부모님은 집에서 꽤 떨어진 곳으로 나가 리어카에 옹기를 싣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며 옹기 장사를 하셨다.
외조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큰언니는 타지에서 공장을 인수받아 들어온 새 사장의 아들과 결혼을 했다.
우리 집이 공장 옆에 있었고 오가며 장인들이 옹기를 만들기 위해 붉은 흙을 퍼내는 첫 번째 작업,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작업실 물레 앞에 앉아 찰흙을 붙이며 물레를 돌리는 장인들의 몸짓, 그것을 다 만든 후 두 명의 장인이 양손에 긴 두 개의 나무토막을 맞잡고 그 위에 아직은 부드러운 찰흙 항아리를 고여 들고 넓은 지붕이 있는 그늘로 옮겨 내놓던 모습, 불가마에 넣고 작은 불 큰 불로 여러 날 굽는 과정을 보며 자랐다.
가마에서 다 익어 옹기가 되어 나오는 날엔 나도 가마로 나가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시는 어머니의 전두 지휘아래 가족들과 함께 잰걸음으로 옹기를 마당으로 옮겨 놓기도 했다. 어렸던 나는 작은 뚝배기 한 개씩만 들었지만.
외조부가 처음 세웠던 큰 옹기 가마 외에 떡시루를 주로 만들어 굽는 회색의 질그릇 옹기가마가 같은 동네 사람들에 의해 두 군데 더 생겨났다.
한겨울이면 걸인 가족들이 비어있는 옹기 가마 안에 들어가 겨울을 나고 가기도 했다.
부모님이 옹기들을 모양과 크기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자주 들었다. 오갈 투가리(위가 오목한 작은 뚝배기), 소래기(항아리 뚜껑), 통개(제일 큰 항아리)등 방언사전에도 없는 명칭들을.
내가 중학교 때 부모님은 장사 터전을 서울로 옮기셨다. 넓은 터를 마련해 몇 팀의 소매상인을 두고, 당신들은 가게에서만 판매하는 도매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장사 규모를 키운 부모님은 거래처도 넓혀 전국 공장들을 다니며 대형 트럭으로 옹기를 자주 받아왔고 나는 높이 쌓인 항아리 사이를 다니며 동생과 숨바꼭질했다.
십 대에 가출한 큰오빠를 제외하고 한 오빠는 옹기 장인의 길을 잠시 걸었고, 다른 형제들은 옹기 장사의 길을 잠시 또는 길게 걸었다.
내가 결혼하면서 어머니는 김장을 담가 넣을 큰 항아리, 양념을 담아 보관할 오갈 투가리들을 주셨고 역시 옹기상인의 길을 걷고 있던 큰언니도 앙증맞은 단지들을 선물로 주셨다. 단칸방 신혼 살이었지만 그것들을 되도록이면 장소를 덜 차지하도록 큰 항아리 안에 작은 단지들을 넣어 보관했다.
언제가 될 런지 모르지만 내 집은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으로 마련해야지, 햇빛과 바람이 넉넉한 곳에 종갓집 같은 장독대를 꾸미리라. 어머니가 그랬듯 간장 고추장 된장을 담가 독 안에 그득그득 담아 놓아야지. 무시래기 고구마순 호박 등 말린 나물들도 그 속에 보관하리라는 꿈을 가지며 지냈다.
몇 년 후 주택이 아닌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고, 두 번 더 다른 아파트로 이사하며 주인 따라 옹기들도 함께 옮겨 다녔다.
어머니가 예순 해 동안 운영하시던 옹기 가게를 여든셋의 연세에 닫으면서 유산으로 또 주셔 옹기의 숫자가 늘어났다.
여러 해가 더 지나서야 경기도 산자락에 원하던 주택을 마련하게 됐다. 주말에만 다니는 집이긴 했지만.
정남향의 마당 한쪽에 장독대를 만들어 그동안 모아두었던 옹기들을 올려놓고 주말마다 다니며 장을 담그고 효소를 담그고, 나물을 데쳐 말려 보관하며 보냈다.
십일 년이 지나 산자락의 주말살이를 접고 옹기는 다음에 옮겨간 텃밭으로 함께 옮겨졌다.
텃밭 여기에 우리 가족의 내력이 나란히 앉아 있다.
묵묵히 살고자 하는 나의 소망과, 혈육들의 떠나고 멀어짐을 붙잡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의 교점에도 옹기가 있다.
항아리 아래에 깨진 옹기 조각으로 수평을 맞춰 높이 쌓아 한 번도 넘어지지 않던 옹기 더미가 하나하나 넘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셨고 부모님처럼 젊어선 옹기를 밖에 내다 팔고 나이 들어선 가게를 운영하시며 흙이 옹기가 되어 나오는 과정처럼 정직한 과정을 거쳐, 옹기처럼 단단한 부를 이룬 큰언니는 형부가 세상을 뜨신 후에도 가게를 계속하다가 얼마 전에 노환으로 가게를 접었다.
십 대 후반에 어둑한 작업실에 앉아 돌아가는 나무 물레를 따라 고개를 같이 돌리며 흙 반죽을 양면으로 두들기고 바깥쪽엔 양 손잡이를 붙이던, 옹기 장인의 길을 잠깐 걸었던 둘째 오빠는 직장생활 중 나타난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올케 언니의 병시중을 받으며 지내고 계시고, 여러 해 상인의 길을 걸었던 셋째 넷째 오빠는 삼십여 년 전, 십 년 전에 세상을 떴다.
역시 여러 해 옹기 장사의 길을 걷다가 직업을 몇 번 바꾸고, 늦은 나이에 시작한 양초 사업이 불 일 듯 일자 애잔한 형제와 조카들을 두루 살펴 챙기고 틈틈이 형제들을 데리고 여행 다니던 막내 오빠는 지금 간경화와 투병 중이다.
오빠는 사업 중에도 마지막 노후의 꿈을 자주 얘기했었다. 옹기장사할 거라고. 항아리를 쌓아놓고 옆에서 옥수수도 쪄서 팔 거라고. 그럴 때마다 옥수수 찌는 알바는 나를 채용해 달라고 오빠에게 부탁했었다. 오빠의 건강이 어서 좋아져 오빠는 손님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켜 저거 보여 달라는 항아리를 내려 보여주며 팔고, 나는 뜨거운 옥수수를 집게로 집어 싸주는 알바로 바빠지기를 기원한다.
피붙이들에 대한 애절함으로, 나 또한 이승에서 흩어질 허망함으로, 문명은 점토로 시작되었다는 자부심으로 저 옹기들을 끌어당겨 내가 가장 소중히 간직하는 물품으로 껴안는다.